'2009 한국마임'4人4色 '고도를 생각하며' 등 21편의 작품 한자리에

1-'고도를 생각하며'
2-'변태'
3-'2009 할매꽃'
비좁고 어두컴컴한 지하 극장에 인파가 끝도 없이 몰려든다. 계단까지 사람들이 빈틈없이 들어찬 후에야 공연은 겨우 시작됐다. 대사 한 마디 없이 배우의 몸짓과 호흡으로만 채워지는 무대.

온몸에서 땀을 뻘뻘 흘리기 시작한 남자는 소리 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가 하면, 허공을 향해 두 눈을 부릅뜬 채 고성을 내지르기도 한다. 혼자 웃고 울고 절규하는 광기의 향연. 관객은 그 광기에서 자신을 발견하고는 움찔인다.

지난 4일 대학로 블랙박스씨어터에서 열린 마임예술축제 '2009 한국마임'의 현장이다. 올해로 21회를 맞은 이 행사는 한국 마임예술의 현재를 확인하는 자리로, 중견부터 신진 마임이스트들이 참여해 총 3일부터 15일까지 21편의 작품을 같은 공간에서 볼 수 있는 기회다.

'마임' 하면 어릿광대의 팬터마임만 떠올리는 고정관념을 무색케하듯, 20~30분 간격으로 이어지는 작품들은 상상이상으로 다채로웠다. 관객과 함께 웃고 즐기는 마임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몸을 통해 소통 불능의 시대를 진지하게 고찰하는 작품도 있었다.

올해 '2009 한국마임'의 특징은 관객을 상대로 무언의 모놀로그를 펼치는 익히 잘 알려진 형식과, 두 명 이상의 마임이스트가 등장해 서로의 세계를 융합하는 작품들이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1-'내일을 향해 쏴라'
2-'빛깔있는 꿈'
박미선 연출의 <고도를 생각하며>는 후자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재해석한 이 작품은 한국 마임의 중견 마임이스트 고재경과 이경열, 라반움직임연구소의 양미숙과 춘천마임축제에서 도깨비어워드를 받은 노영아 등이 4인 4색을 펼쳐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다.

유쾌한 마임을 보여주는 이경열과 고재경 마임이스트는 자신들의 장점인 관객과의 원활한 소통능력을 이번 작품에서도 발휘하며 마임의 매력을 배가시켰다. 이날 계단까지 관객에 가득 차는 호응을 얻은 것은 어쩌면 마임 공연의 부재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발레 마임'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공연 예술에서 마임은 유용하지만 마임이 독자적으로 주목받을 기회는 많지 않다.

한국에서 지금까지의 마임 공연은 춘천마임축제 혹은 판토마임을 말한다. '서울에서 열리는 마임축제'가 생경한 느낌을 주는 이유다. 공연계에서는 '봄에는 춘천, 가을에는 서울'의 양대 마임축제로 알려져 있지만 상대적으로 '한국마임'은 춘천마임축제에 비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춘천마임축제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한국마임페스티벌은 원래 서울에서 열렸던 행사다. 당시 규모가 큰 연극제나 음악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주류 축제였던 마임페스티벌은 '살아남기 위해' 춘천으로 1989년 본거지를 옮겼다.

마임 예술의 소외가 한국만의 사정은 아니다. 찰리 채플린을 무성영화시대의 스타로 만든 것은 그의 뛰어난 마임 실력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임이 조명을 받지는 못했다. 세계적인 마임이스트 마르셀 마르소는 미국공연에서 만난 팝스타 마이클 잭슨에게 백 슬라이드(back slide) 마임을 알려주어 '문 워크'란 춤의 계기가 되었지만 사람들은 정작 마르소를 기억하지 못한다.

전 세계적으로 저변이 넓지 못한 장르인데다 외국과의 교류가 별로 없었던 탓에 한국 마임의 발전 속도는 더딜 수밖에 없었다. 세계적으로도 마임이 존재하는 나라도 몇 곳 되지 않는다. 아시아권에서도 일본 다음이 한국이다. 중국은 아예 마임이란 장르가 존재하지 않는다. 1980년대 말, 국내에 다섯 명뿐이던 마임이스트는 현재 41명이 한국마임협의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협의회 회원이 아닌 배우까지 합하면 80명 안팎 정도다. 한국마임협의회의 역사 20년의 세월을 감안하면 타 장르에 비해 턱없이 적은 숫자다.

'2009 한국마임'은 이러한 한국 마임의 더딘 발전을 재촉하는 행사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마임극단 내부에서 이어져 온 공동창작 작업이 이번 축제 프로그램에서 많아진 것은 대중에 마임의 다양성을 알리기 위한 효과적인 기획이었다. 여러 배우가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극을 완성해가는 공동창작 방식은 관객뿐 아니라 마임이스트들 자신에게도 새로운 마임의 가능성을 찾는 기회가 된다.

화가 이중섭의 생애와 그림을 소재로 한 마임공작소 판의 <빛깔 있는 꿈>은 한국마임협의회 유홍영 회장을 주축으로 선후배가 한 무대에서 호흡을 맞춰 공동작업의 성공적인 선례로 꼽을 수 있다. 그 외 <내일을 향해 쏴라>, <2009 할미꽃> 등의 작품들 역시 선후배의 교류를 넘어 세대 간 마임의 만남이라는 측면에서 기대되는 작업들이다.

다른 예술 장르가 마임에 미치고 있는 영향도 이번 '2009 한국마임'에서 나타났다. 몸짓과 표정연기라는 특성상 무용이나 연극에서 마임의 요소는 중요했다. 최근 무용이나 연극이 디지털이나 타장르의 특징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데서 해당 장르의 영역을 확장하듯 마임 역시 비슷한 맥락으로 보여질 수 있다.

'2009 한국마임'에서 박종태의 <변태>가 바로 그런 작품이다. 현실의 부조리함을 표현하듯 반복적인 동작과 미디어 아트적인 요소를 가진 이 작품은 현대무용과의 구분을 어렵게 한다. 전형적인 마임, 흔히 알고 있던 판토마임을 기대한 관객들에게 이 같은 작품은 마임에 대한 참신한 인상을 갖게 한다.

하지만 이 같은 변화에 대해 현재 한국마임협의회의 부회장을 맡고 있는 고재경 마임이스트는 "공연 양식의 변화는 사실이고 당연하지만 마임 자체가 진화할 수는 없다"고 단언한다. 마임이스트들이 공연 형태에 따라 마임에 나름의 색깔을 입히는 과정에서의 변화라는 것.

경계를 넘고 융합되는 현재의 공연예술 시대에 묵묵히 말의 에너지를 몸으로 치환하는 마임. 변하지 않는 마임의 매력으로 '무대와 객석의 보이지 않는 벽'을 꼽는 고재경 마임이스트. 보이지 않는 그 벽이 중요한 것은 무대가 주는 신비감이 곧 마임의 생명력이자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번 축제는 마임의 생명력은 고스란히 간직한 채로 마임의 다양한 확장의 가능성을 엿보게 해주는 자리가 되고 있다.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