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작품·패션코드로 실체화… 인간의 본성 들여다보는 코드

1-드라마 '라이 투 미'
2-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
3-영화 '13일의 금요일'
올 가을 공연장을 북적이게 만드는 스테디셀러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와 <오페라의 유령>의 공통점은 뭘까. 두 작품의 주역이었던 브래드 리틀을 떠올린 사람도 많겠지만, 또 하나를 꼽자면 '또 하나의 나'라는 모티브다.

하이드는 지킬의 분리된 일면이고, 팬텀은 자신의 흉측한 본 모습을 감추기 위해 가면을 쓴다. 분리된 하이드의 광기와 추락, 팬텀의 일그러진 욕망과 종말이야말로 관객들이 두 작품에 열광하고 재미를 느끼는 요소다. 왜 그럴까. 아마도 '사회생활'이라는 전제 아래 저마다의 가면을 쓰고 '또 하나의 나'를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그들에게서 발견하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예술작품 안의 캐릭터나 심리학에서 외적 인격을 뜻하는 용어인 '페르소나'가 '사람(person)'이라는 단어의 어원이자 '가면'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페르소나는 원래 그리스 배우들이 무대에서 썼던 가면이었고, 이 배우들은 사회에서 필요한 가치나 규범을 표현하는 특정한 인격체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현대의 예술작품에 등장하는 가면이 관객에게 비슷한 기능을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동양과 서양, 가상과 실재공간을 막론하고 다양한 형태와 쓰임새로 기능하고 있는 가면들은 그대로 그것이 처해 있는 현실을 말해주는 도구다. 가면은 기본적으로는 자신을 숨기는 도구이지만, 때론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나'이고, 어쩌면 '되고 싶은 나'이기도 하다.

가면 뒤로 숨긴 '나'의 정체

1-'마스크전'
2-연극 '반호프'
3-연극 '햄릿-고요한 육신'
올해 미국에서 최고의 인기를 끌었다는 드라마 <라이 투 미>에는 표정이나 몸짓을 보고 상대방의 거짓말 여부를 판별하는 전문가 칼 라이트만 박사가 등장한다.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보디 랭귀지의 진리를 체득한 이의 눈은 말과 따로 노는 눈빛과 표정을 귀신 같이 읽어낸다.

라이트만 박사 정도는 아니지만 우리는 소통할 때 상대방의 반응을 통해 마음을 알 수 있고 우리의 태도를 정할 수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얼굴 표정이 무언가에 가려져 있다면? 이쪽은 상대방의 심중을 알지 못해 경계하게 되고, 어떤 상황에서는 공포마저 느끼게 된다. 가면을 쓴 것만으로 힘을 갖게 되고 관계에서 우위에 서게 되는 것이다.

수많은 공포영화의 살인마 캐릭터들은 바로 이런 점에서 비롯됐다. 가면과 분장을 한 채 노는 축제였던 할로윈을 공포의 분위기로 몰아간 <할로윈>의 마이크 마이어스의 섬뜩한 마스크, <13일의 금요일>의 제이슨 부히즈의 그 유명한 하키 마스크, 피해자의 얼굴 가죽을 벗겨내 만든 <텍사스 전기톱 살인마>의 인피 마스크, 뭉크의 동명 작품을 영화로 끌어들인 <스크림>의 스크림 마스크까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의 공포는 마스크라는 매체를 통해 피해자와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 박사의 마스크는 그의 정체를 가리지는 않지만, 대신 그의 제어할 수 없는 폭력성을 상징해줘 공포심을 배가시키는 역할을 한다.

모두가 가면을 쓰고 있는 상황이라면 어떨까. 드레스 코드가 있는 파티나 가면무도회의 경우 가면은 잠시나마 자신의 신분에서 벗어나고 싶은 은밀한 욕망을 구현해주는 도구다. 스탠리 큐브릭의 유작 <아이즈 와이드 셧>에서의 가면이 바로 그런 기능을 한다.

여기서 가면은 상류 계급의 뉴요커들의 일탈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도구다. 시종일관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영화와 그 제목('질끈 감은 눈')이 시사하는 바는 성적 일탈에의 욕망과 그것을 억제하는 윤리의식과 결혼 제도의 갈등이다. '얼굴'이라는 계급의 징표를 무효화시키는 가면은 비밀 회동에 모인 뉴요커들의 신분 체계를 극복시켜 '부적절한' 관계를 맺게 하는 일탈의 장을 마련해준다.

살아 있는 페르소나에 인공미를 넣었다

페르소나라는 말의 역사만큼 공연예술에서 배우의 표정 연기란 절대적이다. 특히 춤과 연극에서 무용가나 배우의 마임은 극의 전개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다. 그런데 '연기자의 예술'인 이 장르에서 표정을 거세한다면? 공연자의 얼굴에 가면을 씌운 창작자들의 실험은 그렇게 시작됐다.

클래식 발레에서 발레리나의 마임은 캐릭터의 내면을 표현하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지만 마기 마랭의 <신데렐라>에선 이러한 발레의 특성이 소용 없어진다. 프로코피예프의 고전적 작품을 대폭 고친 이 작품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그는 무용수 전원에게 인형 가면을 씌워 낯선 발레를 만들어냈다.

희로애락의 표현이 없이 계속해서 무표정인 신데렐라와 왕자를 보고 있자면 어느새 낭만적인 동화는 사라지고 그냥 인형극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동화의 형식이되 어린이의 정서가 아닌 원작들을 감안하면, 제멋대로의 개성들로 넘쳐나는 이색적인 마랭의 발레는 오히려 어린 관객들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지난 15일 서울국제공연예술제의 해외 초청작으로 대학로예술극장에서 공연된 로베르토 바치의 연극 <햄릿-육신의 고요>는 '햄릿'이라는 정형적이고 비장한 캐릭터와 극 전개에 가면을 통해 생동감을 불어넣어주는 작품이다. 이제 햄릿은 모든 이에게 16년째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로 갈등 중인 고뇌의 달인 캐릭터로 굳어졌지만, 적어도 이 작품에서 관객은 햄릿을 하품하며 볼 수만은 없었다.

6명의 가면을 쓴 결투자들은 하나의 캐릭터에 머무르지 않고 각각 클로디어스 왕, 거투르드 왕비, 유령, 오필리아, 호레이쇼, 폴로니우스 등을 넘나들며 햄릿을 몰아세운다. 이들은 햄릿 내면에서 인격적 대립을 일으키고, 우유부단함을 부추겨 결정을 주저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 극에서 가면은 각각의 캐릭터에 대한 재해석과 함께 셰익스피어의 텍스트에 새로운 질문들을 던지며 작품을 더욱 진보적으로 만들었다.

한편 창작집단 '거기 가면'의 넌버벌 마스크 연극 <반호프(Bahnhof)>는 바치의 작품보다 한술 더 뜬다. 여기선 4명의 배우가 무려 37명의 역할을 해냈다. <반호프>가 특이한 것은 가면극임에도 불구하고 대사 대신 마임으로만 극이 진행된다는 점이다. 여기서 쓰이는 가면은 얼굴의 앞면이나 윗면만 가리는 서양의 마스크와는 다르다. 얼굴의 앞면과 옆면까지 가린 가면들은 배우에게 대사를 하지 않고 만들어진 표정대로만 연기하라는 숙명을 부여한다.

그래서 백남영 연출과 이 가면들을 만든 이수은 제작자는 인물의 성격을 뚜렷이 나타내고 있는 <반호프>의 가면을 '성격 마스크'라고 부른다. 샐러리맨, 승무원, 소매치기, 외국인까지 너무 많은 인물들이 무대를 채우는 까닭에 이 작품의 주인공은 가히 마스크 그 자체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37개의 개성이 각각 두드러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건 장삼이사의 소소한 일상이라는 연출자와 마스크 제작자의 의도가 37개의 가면에 그대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마스크, 허상이거나 환상이거나

맨 얼굴은 진짜 자신, 진실을 나타낸다고 사람들은 믿는다. 사진은 그런 사실을 가장 객관적으로 담아낸다고 알려져 있다. 수십 년 동안 '사진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사실 명제로 기능해왔다. 그럼 사진으로 담아낸 얼굴들은 모든 진실일까.

이달 13일부터 서울 신문로 성곡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마스크전>은 이런 의문에 대한 비판적 대답이다. 이 전시는 이런 사실주의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며 예술은 단순히 현실 세계의 복제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프랑스, 독일, 중국 등 전 세계 40여 명의 사진작가들의 다루고 있는 사진 속 얼굴이나 신체는 일상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니라 '마스크'로 분장한 모델이거나 원본 사진에 조작을 가해 변형시킨 것들이다.

성형수술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몸을 스스로 실험의 장으로 만든 오를랑(Orlan)이나 소꿉친구들을 변장시켜 카메라 앞에 세운 라르티크(Lartique)가 그 예다. 이들은 우리가 살아가며 마주치는 얼굴이나 몸짓이 과연 진실 그대로를 드러내주고 있는가에 관해 의문을 던진다.

'가면을 쓴 사람들'이라는 이번 전시의 부제는 이처럼 가면을 씌운 사진 속 현실은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 아니라 허상이거나 조작된 환상을 전제로 한다고 말하고 있다. 디지털 사진의 탄생으로 모든 기술적 트릭이 가능해진 지금, '완벽하고 아름다운 이미지'의 마스크는 현실의 진부함과 추함을 숨기는 도구라는 것이다.

이 같은 은폐와 신비화에 대한 가면의 기본적인 속성은 그 어원에서 잘 드러나 있다. 오늘날 속눈썹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화장품의 뜻으로 쓰이는 '마스카라(mascara)'는 마스크(mask)의 라틴어 버전이며, 그 어원은 아랍어의 maskhara다.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 <적의 화장법>은 자기 안에 있는 또 다른 자기 때문에 결국 자살에 이르고 마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룬다. 자기 안의 너무나 강력한 또 하나의 자아에 잠식당한다는 이야기는 <지킬 앤 하이드>의 설정과도 흡사하다. 결국 여기서의 화장법이란 메이크업의 의미가 아니라 자신을 위장하고 은폐하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시대를 통틀어 가면은 인간의 본성을 들여다보는 하나의 코드라고 할 만하다. 예술작품이나 패션 코드로서의 실체화된 가면 외에도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늘 심리적 가면과 맞닿은 삶을 살고 있다. 인터넷 세계에서는 ID라는 또 하나의 정체성과 닉네임을 가지고 가상공간을 누빈다. 더 복잡해진 현대사회에서 가면은 그래서 또 하나의 나(진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가 아니기도 하고, 때론 그 사이에 있는 모호한 욕망의 표현이기도 하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