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버' 판소리, 국립관현악단 이어 '로봇공주와 일곱난쟁이' 주연 출연

느릿느릿, 인간을 따라 걷는 로봇. 이윽고 계단에 이르자 천천히 발을 옮겨 계단을 오른다. 보는 사람들은 탄성을 지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간형 로봇(안드로이드)의 현재는 이런 모습이었다. 로봇 격투대전에서 빠르고 현란한 움직임을 보이는 로봇들은 무선 조정이나 자체 프로그램 입력의 수준에서 움직이는 소형 로봇들이었다. 도로에서 교통정리를 하거나 아이들을 돌보는 로봇의 모습은 아직까지는 영화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올해 인간형 로봇의 발전은 눈부시다. 한국생산기술연구원이 개발한 국내 최초의 인간형 로봇 에버(EveR, Eve+Robot)는 지난 2월 국립극장에서 판소리 시연회 <에버가 기가 막혀>를 공연한 데 이어 5월에는 국립관현악단의 <엄마와 함께하는 국악보따리>에 출연해 관객들의 흥미를 자극했다. 그런 에버가 이번에는 '백설공주' 이야기로 연극 무대에 도전했다. 지난 13일과 14일 노원문화예술회관에서 인간 배우와 함께 연극 <로봇공주와 일곱난쟁이>에 주연으로 출연하게 된 것이다.

이야기의 큰 틀은 백설공주이지만 '로봇공주'라는 존재는 그 안에 담긴 철학마저 바꾸어놓았다. 이 작품에서 안드로이드 공주는 영원한 아름다움과 젊음에 대한 여왕의 욕심이 만들어낸 결과다. 기계화된 인간을 통해 영원불멸의 미를 추구하려는 인간 욕망의 결정체인 셈이다. 로봇이라는 매체 하나로 시골마을의 아날로그 원작이 <은하철도 999>의 우주적 세계관까지 확장시키는 변화를 초래한다.

인간과 비슷한 사고와 행동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안드로이드가 점차 인간의 정서나 영혼에 대해 궁금해하고 나중에는 진정한 인간의 모습을 꿈꾸게 된다는 설정은 영화 <아이, 로봇>이나 를 연상시킨다. 결국 권선징악의 큰 틀 안에서 인간과 로봇의 평화로운 공생으로 마무리되는 결말은 대부분의 로봇 소재 작품들이 그리는 결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나 드라마와는 달리 NG가 있을 수 없는 공연예술의 특성상 로봇이 출연하는 연극이란 쉽지 않다. 각종 '세계 최초'라는 타이틀이 붙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중 인간의 형체로 제작된 안드로이드가 인간 배우와 '합'을 맞추며 본격적으로 극을 이끄는 것은 연극사적 의미에서 세계 최초라는 의미를 갖는다.

국내에서는 이제까지 KAIST 지능로봇연구센터가 자체 개발한 로봇이 연극 출연을 시도했었지만 불발됐었고, 일본에서는 지난해 미쓰비시중공업이 개발한 로봇 와카마루(wakamaru)가 연극 <일하는 나>에 출연한 사례가 있다.

임시적이긴 하지만 '로봇 연극'이라고 명명된 만큼 이 작품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것은 '로봇공주' 역을 맡은 에버의 존재다. 에버는 신장 160cm, 몸무게 50kg의 평균 여성 체격에 62개의 관절과 실리콘 복합소재 피부를 가져 사람의 형체와 흡사한 외모를 지니고 있다.

제작에 참여한 개발팀이 특별히 신경썼다는 '표정'도 12가지나 된다. 에버가 표현 가능한 표정들은 얼굴에 장착된 23개의 모터에 의해 구동된다. 인체 해부학에 근거해 표정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얼굴 근육을 연구한 에버 개발팀은 근육의 역할을 하는 부위에 모터와 와이어를 장착해 에버가 가능한 한 자연스러운 표정을 짓도록 만들었다.

에버가 처음부터 이런 '능력'들을 갖게 된 것은 아니다. '첫' 에버는 안내원처럼 한 자리에 서서 정적인 일만 수행하는 로봇이었다. 이후 나온 '에버 2'부터 노래와 율동이 가능해졌다.

지난해 SBS <스타킹>에서 가수 데뷔를 하며 올해 <에버가 기가 막혀>와 <국악보따리> 등에 출연한 것도 에버 2다. 이번 무대에 서게 되는 에버 3는 바퀴를 달아 구동능력을 보강한 점에서 진일보한 버전이다. 또 에버 2가 가진 한계를 보완해 더 정밀하고 유연한 동작들을 '사람에 가깝게' 보여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모든 것이 최초인 만큼 어색한 움직임은 역시 어쩔 수 없다. 로봇 기술 자체로는 급속한 성장을 했지만, 살아있는 인간 육체의 장인 연극 무대에 서기에는 모든 것이 미흡할 수밖에 없다. 로봇 연극에 대한 자문을 해주다 연출까지 맡게 된 김현탁 연출가 역시 로봇을 조종하는 과학자들과 배우들의 호흡을 맞추고 조절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말한다.

에버 2의 경우처럼 공연 시 로봇이 순간 멈춰버린다면 큰일이다. 반응이 없어지면 인간 배우들 역시 다음 장면을 연기할 수 없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김현탁 연출은 그래서 로봇 조종팀에게 세세한 연기 주문보다는 주인공이 느낄 감정과 상대배우와의 호흡에 대해서만 설명했다. 인간 배우들은 돌발상황에 대처하는 방법들을 고민하며 로봇 연극의 한계를 보완했다.

최근 첨단기술과 문화예술의 만남은 두 분야의 결합을 넘어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공동작업을 통해 새로운 분야를 파생시키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고 있다. 특히 디지로그(Digital+Analog)가 공연예술계의 화두가 되며 대중의 관심과 수요가 증가하는 지금, 로봇 연극의 등장은 이제까지 산업용에 그쳤던 로봇이 새로운 문화 콘텐츠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마저 보여주고 있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