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계 새 바람한국 정서와 부합하고 원작 변형이 용이, 틈새시장 활용도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를 빼놓고 뮤지컬을 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전형적이고 상투적인 할리우드영화가 한때 한국영화의 붐을 불러왔듯이 이미 뮤지컬팬들에게 두루 알려진 유명 뮤지컬들의 대안으로 '다른 뮤지컬'이 떠오르고 있다.

한동안 대안 시장의 주류는 프랑스 뮤지컬이었다. <노트르담 드 파리(Notre Dame de Paris)>, <돈 주앙(Don Juan)>, <로미오와 줄리엣(Romeo & Juliet)> 등 올해 한국을 찾은 작품도 꽤 된다. 이밖에 <십계(Les Dix)>와 <벽을 뚫는 남자(Le Passe-Muraille)>도 끊임없이 사랑받고 있는 프랑스 작품이다.

하지만 올해 부각된 또 하나의 대안은 체코 뮤지컬이다. 화려한 한국 캐스팅으로 화제를 불러모았던 <삼총사>와 <클레오파트라>가 상반기에 관객들과 만나며 체코 뮤지컬의 참신한 맛을 알렸다.

지난달부터 초연되고 있는 <살인마 잭>은 올 연말 최대의 화제를 뿌리고 있는 체코 뮤지컬이다. 올해에만 세 편의 체코 작품이 등장했다는 것은 국내 뮤지컬 시장이 몇 해 전부터 대안 시장의 하나로 체코를 눈여겨보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체코 뮤지컬의 등장은 갑작스러운 것은 아니다. 1998년 처음으로 등장한 체코 뮤지컬 <드라큘라>는 2000년과 2006년, 계속해서 팬들의 호응으로 무대에 올려지고 있는 인기작품이다. 이 작품은 초연 당시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두며 재공연될 때마다 700여 명의 뮤지컬배우와 연예인이 오디션에 대거 참여할 정도로 기존 뮤지컬 작품과는 다른 참신한 매력을 발산했다.

'살인마 잭'
인기의 배경에는 단순히 '드라큘라'라는 캐릭터와 스토리의 매력뿐만 아니라 오페라의 성악 창법과 팝의 재즈 보컬, 락의 샤우팅 창법까지 아우르는 다양한 음악 장르가 망라된 뮤지컬로서의 매력이 더 컸다는 것이 관객들의 평가에 드러나 있다.

체코 뮤지컬의 복귀는 <햄릿>부터 본격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2000년부터 2006년까지 6년간 1000만 명의 관객을 모아 유럽 뮤지컬 시장에서 이미 검증받은 히트작이었던 <햄릿>은 브로드웨이를 거쳐 2007년 아시아 최초로 공연돼 화제를 모았다. 모든 초연 작품이 그렇듯이 무대에 올리기 전까지 흥행 여부는 알 수 없었지만 뚜껑을 열자 비극을 뮤지컬로 감동적으로 변주한 공연에 관객들은 매진으로 답했다.

특히 무대와 의상, 안무 등을 한국 정서에 맞게 바꾼 점이 주효한 한국 버전의 성공은 지난해 시즌 2 제작으로 이어졌고, 체코 원작자가 한국 측 계약사에 세계 공연을 위한 월드버전 제작을 제안하기도 했다. 월드 투어에서 나오는 공연 수익과 로열티도 공동배분이고 아시아 판권 역시 한국 측이 갖는 조건이어서 뮤지컬시장에서 한국시장의 위상 변화를 실감케 했다.

체코 뮤지컬 붐이라는 말이 나온 것도 이즈음부터다. 지난해 9월 역시 초연으로 한국 시장을 두드린 뮤지컬 <클레오파트라>도 이집트와 로마의 화려한 의상과 무대장치로 흥행가도를 달렸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듯 올해 두 번째 공연과 함께 인기뮤지컬 <삼총사>의 초연과 맞물려 체코 뮤지컬의 상반기 점령을 선도했다. 2004년 체코 프라하에서 초연된 뮤지컬 <삼총사> 역시 음악을 제외하고 대본과 연출, 무대와 의상까지 한국 제작진에 의해 새롭게 재창조된 한국식 체코 뮤지컬이다.

체코 뮤지컬이 잇따라 성공을 거두는 이유는 한국의 정서와 잘 부합되는 성격에 있다. 유명한 브로드웨이, 웨스트엔드의 뮤지컬도 정작 한국시장에 와서 실패하는 사례를 보듯이 국내 관객에게 정서의 문제는 중요하다.

''클레오파트라'
신윤성 칼럼니스트는 "체코 뮤지컬은 대체로 드라마의 깊이가 있고 그에 어울리게 클래시컬한 정서와 아름다운 음악이 있어서 한국의 정서와 잘 어울린다"고 말한다. <햄릿>이나 <삼총사>처럼 낯익은 명작이 기본적으로 편안함을 준다는 점도 장점으로 평가된다.

국내 프로덕션이 원작을 변형하기에 용이한 점도 체코 뮤지컬의 제작 시도가 빈번한 이유 중 하나다. 원작 뮤지컬의 수정은 나라를 불문하고 극히 까다롭기로 알려져 있다. 반면 체코 뮤지컬은 극본이나 안무, 무대 등에서 상대적으로 변형에 너그러운 편이다. 그래서 <삼총사>의 경우도 음악만 제외하곤 대부분은 국내산 뮤지컬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한국 관객의 입맛에 맞게 대사나 극의 구성을 바꿀 수 있다는 점은 제작과 흥행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체코 뮤지컬 붐의 원인으로는 틈새시장의 발견이라는 점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이미 대형 프로덕션들이 영미권의 인기작들은 선점해 놓은 상태에서 새로우면서도 상업성을 겸비한 대안 시장 중 하나라는 것이다. 잠깐 불었던 프랑스 뮤지컬 붐도 이런 배경에서다.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그런 후보 중 하나로 후보에 올랐던 체코 뮤지컬이 서서히 한국무대를 점령한 데는 이런 과정이 있다.

최근 그 붐을 이어가고 있는 초연작 <살인마 잭> 역시 이 같은 성공공식을 충실히 답습하며 좋은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다. 비슷한 소재의 <스위니토드>보다 덜 유명하지만 음악을 제외하고 한국식으로 옷을 갈아입은 '아시아 버전' <살인마 잭>은 벌써 일본 진출 이야기가 나오고 있을 정도다. 체코와 공동 판권을 가지는 점도 또 다른 수익창출의 선순환 구조에 대한 청사진을 가능케 한다.

<삼총사>에 이어 <살인마 잭>까지 연속으로 체코 뮤지컬을 제작하고 있는 엠뮤지컬컴퍼니는 "기존 작품이 갖고 있던 가장 큰 모티프만을 차용해 전혀 새로운 작품으로 만들었다. 창작과 라이선스의 경계를 허물었던 <삼총사>의 출연진과 제작진을 투입하고 새로운 편곡과 과감한 대본 수정을 감행한 만큼 <살인마 잭>은 <삼총사>를 뛰어넘는 작품이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삼총사'
<살인마 잭>의 왕용범 연출가는 "체코 현지에선 이미 한국 뮤지컬을 인정하고 있다. 그래서 본토 작품을 한국에서 다시 만들 때 기대를 많이 한다"고 전한다. 전문가들은 두 나라 간 공동작업의 전제는 예술적 평가와 함께 산업적 측면에서의 상호 신뢰를 꼽는다. 체코 뮤지컬의 등장과 '다국적 수출형 뮤지컬'의 출현은 이제까지 단순한 뮤지컬 소비시장으로 보여졌던 한국이 틈새시장을 찾으며 새로운 동력을 발견했다는 뜻으로도 평가되고 있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