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脫 다중적 감성>전 5人의 작가 미디어 통한 감각의 확장 지평서 흐릿해진 인간을 다시 호출

김기철 'contact', 마이크로폰, 봉제인형, 음향장치, 마이크로프로세서, 2009
'디지脫 다중적 감성'전(11.27--12.20, 갤러리 세줄) 은 전시부제에 속해 있는 '탈(脫)'을 통해서 한 방향으로만 쏠리고 있는 현 단계의 디지털 문화로부터 비판적인 거리감을 가진다는 기획의도를 보여준다. 그것은 1차원적인 스펙터클 문화에 대한 대안으로 '다중적 감성'을 복귀시키려 한다.

이미 1960년대에, 오늘날 쓰이는 '미디어'라는 용어의 의미를 확립한 마셜 맥루언은 <미디어의 이해>에서 '미디어는 메시지'라는 명제를 통해서, 미디어가 메시지를 담는 중성적인 형식이 아니라, 미디어 자체에 내재된 감각적 편향성을 지적한 바 있다.

미디어를 통한 감각의 확장은 단일 감각을 확장하는데, 그것은 한 종류의 감각 밀도만 높임으로서 감각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의 감각이 미디어를 통해 확장되는 와중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 전시의 다섯 작가들은 미디어를 통한 감각의 확장 이라는 지평에서 흐릿해진 인간을 다시 호출한다. 기술은 초창기부터 시각이라는 감각에 강하게 의존해 왔다. 맥루언은 <구텐베르크 은하계>에서 어떤 응용지식이든 그것의 핵심은 복잡한 관계를 명시적인 시각적 용어로 번역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것은 과학적인 표음문자를 통해서 복잡한 말의 단어를 널리 확산하고 전달될 수 있는 시각적 코드로 번역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호한 것들을 코드화하여 점차 시각적으로 명료화시키는 기술, 그것에 대한 첫 번째 대응은 김기철의 '소리 조각' 작업들이다. 김기철의 초기 작업은 보이지 않는 것조차 보이게 만들려는 기술 중심주의적 지향이 강했다. 그러나 이번 전시의 작품 'contact'는 단지 보이지 않는 소리를 보이게 만든다는 발상을 넘어서, 인간의 음성에 반응하여 액션을 취하는 인형들을 매개로하여 육성에 내재된 상호적 친밀성을 강조한다.

이영호 'flip flap loco', 16mm 비디오, 2009
그는 기술 중심주의가 야기하는 시각성과 분리 대신에, 청각성과 접촉을 대안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물론 그의 작품은 원시적인 구술문화로의 복귀는 아니며, '언어란 명료화하는 기술'(맥루언)이라는 맥락에 놓여 있다. 그것은 인간의 직관에 보다 쉽게 반응하는 첨단 기술의 경향, 즉 음성에 의해 환경을 제어하고자 하는 동시대 기술의 관심사와 부응하는 것이기도 하다.

김영헌은 샤워 중인 남자가 욕실 부스로 가정된 표면에 입술을 대면 바깥에 놓인 옷이 숨 쉬듯이 움직이는 장면을 연출한다. 그의 비디오 설치 작업에서, 인터페이스는 인간의 체온이 실린 입김이나 촉각성에 반응하는 듯이 보인다. 관객을 향해 있는 모니터 표면은 마치 터치스크린처럼 작동하면서, 추상적 계산보다는 신체적 직관에 밀착한 기술을 보여준다.

김영헌의 또 하나의 작품은 반투명 인형 동체 안에서 비디오를 투사한 것이다. 바닥에는 중심으로 수렴되는 원환들이 그려진 소금더미가 놓여 있고, 그 위에 불타는 불타의 이미지가 투사된다. 중심을 향한 구도적 여행을 상징하는 만다라가 자신의 역할을 다한 후 다시 무의미한 입자로 흩어지듯이, 모든 것은 망각되고 다시금 대 순환의 주기로 접어들 것이다. 반복을 통한 회귀가 야기하는 명상적 분위기는 계속 루핑하는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가능했다. 그것은 현실을 지배하는 합리화된 선적 시간을 파기하는 것이다.

깊은 구멍을 통해서 바라보게 되어 있는 김도희의 작품은 모든 것을 명약관화하게 만드는 기술에 내재된 의미를 곱씹는다. 작품 '더 진실한 모습을 재현하는 데에 따른 어려움'은 목구멍에 끼워져 있는 기계적 형태는 보는 것만으로도 이물감을 자아낸다. 기계라는 이물질에 고통스러워하는 속살의 떨림이 소형 마이크를 통해 거슬리는 소리로 전달된다.

내시경처럼 병원에서 쓰이는 대부분의 진단 기구들이 인체에 침투하여 암흑 속에 감추어져 있던 물컹거리는 물질 덩어리를 환한 시야에 펼쳐 놓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바깥으로 펼쳐진 몸은 지식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지식은 어김없이 생체 통제 기술 권력과 유착된다.

김도희 '더 진실한 모습을 재현하는 데에 따른 어려움', 비디오, 2009
정보화된 사회에서 보편적화 된 임상의학의 시각은 인간 신체의 마지막 불투명성 까지도 정복하려 한다. 그러나 인간의 몸은 결코 완벽히 코드화 될 수 없는 최후의 식민지로 남아있다. 김도희의 작품은 미지의 대륙으로 남아있는 신체를 정복하려는 기술적 시선에 대한 몸의 격렬한 저항을 보여준다. 이영호의 작품은 최초의 영화 상영과 최초의 롤러코스트가 등장한 시기가 같았다는 점에서 착안하여, 양자의 경험을 어지럼증으로 수렴시킨다.

롤러코스트는 철도라는 이동수단을 놀이로 치환한 것이다. 그것은 철도처럼 하나의 목적지를 향하는 순차적인 이행이 아니라, 곡예비행 같은 극도의 불연속이 특징이다. 선적으로 배열된 레일은 인위적으로 통제된 환경이지만, 조절을 다변화함으로써 자극을 극대화시키고 급격한 상상적 이동을 가능하게 한다.

단선적인 기능주의, 그 경직된 시각적 배열을 포기하고 다양한 감각이 뒤섞이는 장이 바로 오락이다. 오늘날 대표적인 오락으로 자리 잡은 영화는 오감을 자극하는 총체적인 체험으로 거듭나고 있다. 거대한 나무 구조물에 걸쳐져 돌고 도는 필름들은 초창기 영화처럼 거친 화면을 보여준다.

하나의 시점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이미지들의 난무는 19세기 말에 출현한 영화를 필두로 한 영상 문화의 특징이다. 성채처럼 튼튼한 이영호의 롤러코스트와 달리, 21세기에는 즐거운 혹은 괴로운 어지럼증을 일으키는 미디어 문화의 물적 기반을 파악하기 쉽지 않다.

어두운 구멍과 밝은 구멍으로 나뉘는 격자들이 가득한 최성훈의 작품은, 언뜻 두 개의 코드로 이루어진 픽셀 구조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픽셀 안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것은 빛에 실린 정보, 즉 디지털 코드가 아니라 보편적인 주거형식이 된 아파트를 멀리서 찍고 편집하여 스펙터클하게 펼쳐놓은 것이다.

김영헌 'for my son's son', 비디오 가변설치, 2003
거리를 통해 픽셀의 크기가 4단계로 조절되는 그의 작품은 세포막 내부의 유동하는 세포질이나 점점이 빛나는 은하수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0과 1의 단조로운 조합을 넘어서, 우리의 일상적 현실 뿐 아니라 미시우주와 거시우주를 아우르는 총체적 체험으로 거듭난다. 그것은 멀리서 보면 명암으로 구별되는 이차원적인 균질적 공간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입체적이며 이질적인 공간들이다.

대상에 대한 가변적인 관찰 거리를 가능하게 한 것은 첨단 미디어 덕분이지만, 작품 속 풍경은 일종의 촌락을 이룬다. 전기의 힘으로 시공간이 압축된 이 집단 거주지는 지구촌을 닮았다. 맥루언이 말했듯이, 전기의 순간적 속도가 지구촌 문화를 가능하게 했다. 지구촌은 인간의 삶을 정보라는 정신적 형태로 번역함으로서 가능했다. 거대 자본과 유착하는 기술이 이 지구촌을 하나의 시장으로 만들면서 균질화 하는 것과 달리, 예술가들은 '촌'이 본래 의미하는 바와 같은 다양한 문화적 차이들을 보존하려 한다.


최성훈 'APT4' LCD 영상설치 3분, 2009

이선영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