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아트프리즘] 헤세·부르주아·오를랑 미디어로서의 여성의 몸 페미니즘적으로 표현

에바 헤세, Contingent, 1969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프랑스 여성학자 시몬느 드 보부와르의 말은 몇십 년 전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을지 몰라도 오늘날은 매우 평이한 주장처럼 들린다. 그만큼 페미니즘의 담론이 확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페미니스트들에 따르면 이러한 담론의 확산에도 불구하고 정작 여성에 대한 일반적 시각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 이유는 여성의 몸을 보는 시각이 크게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성이나 여성 모두 여성의 몸을 남성의 성적 대상으로 보는 시각이 여전히 일반적이라는 것이다.

여성에 대한 시각이 여성의 몸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다. 정신과 육체의 이분법이 지배하던 전통에서 몸은 정신에 비해 하위의 것으로 간주되었다. 남성에 비해서 여성에 대한 시각이 여성의 몸에 맞추어져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여성에 대한 불평등한 시각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용을 위한 화장이나 성형 등의 몸치장이 여성의 전유물인 것은 여성의 존재가치가 바로 몸에 맞추어져 있음을 증명한다.

메를로-퐁티의 지각 현상학이나 푸코의 미시권력 담론 출현 이후 정신이나 이성보다 몸에 대해서 분석의 초점이 맞춰진 이후 더불어 여성의 몸이 권력관계의 형성에 어떠한 방식으로 활용되었는가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특히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여성의 몸이 남성에게 충동의 부분-대상으로 전락하고 있음을 폭로한다. 라캉에게서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나누는 기준은 팔루스(남근)의 유무이다. 팔루스는 절대적인 존재로서 남근을 소유한 남성은 팔루스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이에 반해서 팔루스를 결여한 여성은 자신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며 팔루스를 타자로서 갈구한다.

루이스 부르주아, La Fillette, 1968
물론 이때 팔루스는 단순히 생물학적인 남성의 기관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팔루스는 배타적인 동일성 혹은 강함, 즉 남성성의 상징이다. 엄격한 가부장제 문화는 바로 팔루스에 기반한 문화인 셈이다. 남성은 배타적인 지배자가 되는 반면에 여성은 타자의 지배를 쉽사리 허용한다.

여성은 항상 남성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줘요'라고 계속해서 거듭(앙코르 - '앙코르'는 여성의 문제를 다룬 라캉의 세미나 제목이기도 하다.) 요구하는 결여의 존재인 셈이다. 여성의 몸은 항상 딱딱한 팔루스를 향해서 부드럽게 그것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서른넷의 나이에 뇌종양으로 요절한 독일 출신의 미국 작가인 에바 헤세(Eva Hesse)는 1960년대 후반에 여성의 몸을 미묘한 방식으로 상기시키는 조각 작품을 전시하였다. 그녀는 전통적인 석고, 대리석, 금속, 나무 등의 딱딱한 재료가 아닌 헝겊, 라텍스, 유리섬유 등을 조각의 재료로 활용하였다.

그녀의 작품은 딱딱함과 말랑말랑함, 거침과 부드러움, 정확성과 우연, 기하학적 형태와 비정형, 완고함과 유연함, 자연성과 산업적 인위성 등 물리적으로나 형식적으로 서로 모순된 대립을 연출하고 있다. 이러한 모순의 대립은 딱딱한 팔루스와 부드러운 여성의 단순한 대립이 아니다. 그녀의 작품에서 이러한 두 가지 속성은 그저 대립하고 있기보다는 서로 뒤섞여 있어서 그 경계가 모호해진다. 말하자면 하나의 몸에 팔루스와 팔루스가 아닌 것이 서로 모순적으로 공존하고 있는 셈이다.

그녀의 작품은 직접적으로 여성이나 남성의 몸을 묘사하고 있지 않다. 가령 1969년의 작품인 '우연'(Contingent)만 하더라도 그러하다. 유리섬유와 무명 천 위에 라텍스를 씌운 이 작품은 8개의 길다란 면이 천장에 매달린 설치조각 작품이다. 직접 사람의 몸을 묘사하지는 않았지만 실제로는 인간 몸의 표피, 즉 피부를 연상시킨다. 직접 몸을 묘사하는 것이 아닌 느낌을 통해서 몸의 질감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천장에 매달린 면들은 마치 칼로 벗겨진 피부처럼 불길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라텍스의 재료에서 느껴지는 부드럽고도 말랑거리는 느낌을 전달하기도 한다.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감정을 통해서 그녀는 분명히 여성의 몸에 새겨진 욕망의 상징과 그것이 제거된 실재의 모습이 서로 교차하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거의 같은 시기에 발표된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의 '소녀'(La Fillette, 1968)는 몸에 대한 페미니즘적 관심을 훨씬 더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은 몸, 그중에서도 특정부위인 팔루스를 아예 노골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석고 위에 라텍스를 덮어 만든 남성의 음경 모양의 이 오브제는 헤세의 작품에서와 비슷한 양가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음경 모양의 이 조각은 집안 천장에 매달려 있을 경우 거세된 남근으로서 매우 혐오스러운 감정을 유발하지만, 에바 헤세가 이 조각을 안고 있을 때는 엄마 품에 포근하게 안긴 아기처럼 보인다. 부르주아는 남성과 여성을 가르는 몸의 한 부분을 대상화함으로써 그 기준에 대한 우리의 관습적 관념을 송두리째 뒤흔들고자 한다. 하지만 헤세나 부르주아의 미술에서 몸은 여전히 외적인 관조의 대상에 머무르고 있을 뿐이다.

엽기적인 성형 퍼포먼스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생 오를랑(Saint Orlan)의 경우에 몸은 단지 관조의 대상이나 표현의 수단이 아니다. 그녀에게 몸 자체가 예술적 행위를 하기 위한 하나의 오브제인 셈이다. 1978년부터 엽기적인 성형을 시도한 그녀는 몸을 재현의 대상이 아닌 표현을 위한 매체 자체로 간주한다.

이마의 한 측면에 지방을 흡입하여 마치 부푼 종양처럼 융기시키거나 턱 선을 변형하는 것은 결코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분명 성형은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행위이며 몸을 변화시키는 행위이다. 오늘날 성형은 미인대회에 나갈 때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아닌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수코스일 정도이다.

성형 퍼포먼스를 하는 작가 오를랑
오를랑의 성형 퍼포먼스는 이러한 성형의 과정과 결과를 매우 아이러니하게 보여준다. 성형은 보티첼리의 비너스를 지향하지만 그 과정은 매우 끔찍하다. 더군다나 성형의 결과물인 오를랑의 모습은 아름답기보다는 기이하다. 그녀의 퍼포먼스는 헤세와 부르주아의 조각 작업을 계승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을 넘어서고 있다.

오를랑은 여성의 몸에 대한 담론이 아닌 여성의 몸이 담론 그 자체임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여성의 몸에 관한 담론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 여성의 몸 자체가 담론의 매체인 것이다. 여성의 몸에 성적 권력과 폭력이 새겨져 온 것이다. 오를랑의 퍼포먼스는 바로 이렇게 여성의 몸에 권력이 새겨지는 과정과 그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우상적 상징을 파괴하고자 하는 우상파괴 행위인 셈이다.



박영욱 연세대학교 미디어아트연구소 HK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