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태평양>서 <장미의 기사>까지… 9박 10일간 공연예술의 진수 체험

오페라 '엘렉트라'
연말연시의 뉴욕은 그야말로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관광객과 휴가를 즐기는 뉴요커들로 인산인해가 되는 시간이다. 공연장들도 서로 작품을 봐달라며 최고의 캐스팅으로 뜨거운 열기를 마음껏 뽐내기에 여념이 없다.

뉴욕에 도착한 24일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으로 유명한 록펠러 센터에서 전세계인과 어깨를 부딪혀 가며 크리스마스 이브를 보냈다. 25일 크리스마스의 브로드웨이는 다른 날 보다 오히려 사람들이 적은 편이어서 할인 티켓 판매창구인 tkts에서 50% 판매 티켓까지 나왔다. 평소에 절찬리에 판매되는 <남태평양>도 40%가 할인 되고 있어 망설임 없이 택했다.

링컨 센터 비비안 보몽 극장에서 장기 공연되고 있는 '남태평양'은 올드 팬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로저스와 햄머스타인의 명작. '여자보다 귀한 것은 없네', '어떤 멋진 저녁', '해피 토크'등 미국 뮤지컬의 아름다운 클래식 레퍼토리들이 쉼없이 귀를 즐겁게 해주는 이 작품은 크리스마스 날에 모인 청중들의 다정한 사랑을 받았다.

26일부터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이하 '메트')로 발걸음을 옮겼다. 토요일에 전통적으로 열리는 1시 공연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엘렉트라>. 작년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내한 공연을 통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 대한 빼어난 해석을 들려준 파비오 루이지가 지휘하고 소프라노 수잔 블록이 엘렉트라를 맡아 불타오르는 파워와 카리스마 넘치는 가창과 열연을 보여주었다.

현실에 만족하며 행복하게 살고 싶어하는 동생 크리소테미스 역의 메트 베테랑 데보라 보이트도 아름다운 가창으로 청중을 만족시켰다. 무한선율의 이 단막오페라를 파비오 루이지는 관능미를 마음껏 발산하며 지휘, 뜨거운 갈채를 받았다.

오페라 '호프만의 이야기'
토요일 메트에서는 두 개의 오페라가 올라간다. 이 날 밤 8시에는 토니상 수상에 빛나는 바트 쉐어 연출의 신작 <호프만의 이야기>가 상연됐는데 그야말로 쉐어의 초감각적이고 무궁무진한 창조력이 폭포수처럼 분출된 작품이었다.

12월 3일에 초연한 이 작품에서,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연애에 실패하는 주인공 호프만 역은 테너 조셉 칼레야가 맡아 열연했고 성악가 안토니아 역에 월드 스타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가 출연해 청중들을 흥분하게 만들었다.

만화경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즐겁고 감칠 맛나는 세트 속에서 역시 가장 관심을 끈 것은 로마의 자동인형 올랭피아 장면. 원래 재미교포 소프라노 캐슬린 김이 등장, 이 역을 부를 예정이었는데 감기로 결장하자 대역이 이 재미있는 역을 화려한 콜로라투라로 소화해내 가장 뜨거운 커튼 콜을 받기도 했다. 새로운 스타 탄생이었다. 전막에 걸쳐서 펼쳐진 여성들의 반신 누드는 호프만 심리 세계의 표출이기도 했다.

28일 월요일 아침 11시에는 연말연시를 휴가 시즌을 맞아 단 8회만 공연되는 훔퍼딩크 오페라 '헨젤과 그레텔' 마티네 공연이 있었다. 겨울방학을 맞은 아이들과 가족들을 위한 공연으로 뉴욕의 개구쟁이들도 그림동화를 오페라로 보기위해 부모의 손을 잡고 모여들었다. 원어인 독일어가 아니라 영어로 공연, 청소년 청중들도 쉽게 극에 빠져들게 만들어 주었다.

리처드 존스 연출의 압권은 가난하고 배고픈 아이들에게 내려진 꿈속에서의 성찬이었다. 나무들이 도열해 있고 물고기 하인이 진두지휘하는 가운데 돼지 요리사들이 줄을 지어 등장, 헨젤과 그레텔을 위한 음식을 맛있게 대접했다. 꿈속에서나마 이 오누이는 배불리 최고의 음식을 먹었다. 반면 피날레에서 헨젤과 그레텔이 마녀의 몸인 파이를 한입씩 베어무는 장면은 무척 잔인했다. 그림 형제 동화의 잔인성이 다시 한번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미남 트럼페터 '크리스 보티'
이날 밤에는 스팅과의 협연으로 유명한 미남 트럼페터 크리스 보티의 공연을 보러 블루노트 재즈클럽을 찾았다. 보티의 공연은 이미 매 공연, 테이블 자리가 매진 사례를 이뤘고 이 공연을 바에서라도 서서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로 블루노트 바깥까지 길게 줄지어 있었다. 부드럽고 달콤한 트럼펫으로 '시네마 천국', '오늘밤 당신의 모습은'등을 1시간 40분 동안 연주한 보티의 매력은 2009 뉴욕의 세모를 장식하는 또 하나의 풍경이었다.

30일은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낮 공연이 있는 날. 낮 2시, 프랭키 발리와 포시즌스의 성공기를 다룬 뮤지컬 <저지 보이스>를 어거스트 윌슨 극장에서 봤다. 자신들이 청년시절 즐겼던 프랭키 발리의 히트 곡들이 연이어 터져 나오는 이 뮤지컬은 미국 중년층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특히 프랭키 발리의 목소리(영화 <그리스>의 타이틀 곡을 부른 가수)를 빼닮은 주인공과 앙상블의 음악적 완성도는 매우 높았다. 즐거운 그러나 짙은 페이소스도 담겨있는 한편의 콘서트를 보는 듯한 느낌의 이 인간미 넘치는 뮤지컬은 미국인들의 향수를 짙게 자극했다.

밤 8시에는 <스위니 토드>로 유명한 스티븐 손트하임의 1973년 작 <작은 밤의 음악(A little night Music)>을 봤다. 연말 브로드웨이에 등장한 연극 <햄릿>의 주드 로와 함께 가장 화제를 모은 캐서린 제타 존스의 첫 브로드웨이 출전작이었고 특히 <캣츠>를 제작한 트레버 넌이 처음으로 도전한 소규모 작품이었다.

월터 커 극장에서 펼쳐진 이 날 공연에서 캐서린 제타 존스는 빼어난 연기력과 미모로 두 남자에게 사랑받는 미망인 데지레 암펠트 역할로 청중을 사로잡았고 이 뮤지컬 중에서 가장 유명한 'Send in the clowns'도 허스키한 목소리로 호소력 있게 소화해냈다. 함께 출연한 아줌마 탐정역으로 우리에게 유명한 안젤라 랜스베리가 연기한 마담 암펠트도 극에 시종일관 폭소를 선사했다. 격조 높으면서도 매우 즐겁고 폭소가 터지는 화제작이 바로 '작은 밤의 음악'이었다.

12월 31일, 링컨 센터는 예상대로 사람들로 북적였다. 리차드 이리의 신작 오페라 <카르멘>이 초연하고 뉴욕필이 에이버리 피셔홀에서 뉴이어즈 이브 갈라 공연을 열었기 때문이다. 초연 날의 전통에 따라 오페라 극장은 멋진 턱시도와 보타이, 이브닝 드레스의 화려한 물결이었다.

로베르토 알라냐가 돈 호세로 출연하자 카르멘으로 등장한 주인공은 라트비아 출신의 메조 소프라노 엘리나 가란차였다. 그동안 메트에서 로시니 <신데렐라>와 <세비야의 이발사>에서 벨칸토 메조로 활약한 가란차는 큰 키와 아름다운 외모와 음성으로 뇌쇄적인 카르멘 역을 소화했다. 이 날 공연은 '승리'(Triump)라는 한 단어로 뉴욕 신문들의 리뷰를 장식했다.

한편 역사상 최초로 검은 양복이 아닌, 원색의 드레스와 보타이를 입고 연주한 뉴욕필 단원들은 미국 레퍼토리로만 제야음악회를 꾸몄다.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미국 바리톤 토마스 햄슨이 코플랜드의 '올드 아메리칸 송'을 노래하고 알란 길버트가 지휘한 뉴욕필은 코플랜드의 '아팔라치아의 봄' 서곡과 거슈인의 '파리의 미국인'을 세련된 사운드로 신바람 나게 연주했으며 앙코르는 청중들도 모두 일어서서 햄슨과 함께 '올드 랭 사인'을 함께 부르며 한 해를 뜻 깊게 마무리 했다.

1월 1일에도 메트 오페라는 쉬지 않았다. 마에스트로, 에도 데 바르트의 지휘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를 공연했는데 여자인척 하는 주인공 옥타비안 역에 메조 소프라노 수잔 그래험, 그의 연인인 베르덴베르크 공작 부인 역에 소프라노 르네 플레밍, 조피에 사랑스런 크리스티네 쉐퍼, 조피와 결혼하고 싶어하는 바람둥이 남작역에 크리스틴 지그문손 등 훌륭한 캐스팅이 앙상블을 이룬 이 화려한 빈풍 오페라로 뉴욕의 신년을 우아하게 장식했다. 워낙 긴 작품이라, 7시 30분에 시작한 오페라는 12시 15분에 끝나긴 했지만 메트를 찾은 뉴요커들의 얼굴엔 흡족한 미소가 가득했다.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연말 연시 뉴욕의 공연장은 뜨거웠다. 불황이라는 말은 뉴욕의 꿈의 극장 속에서는 현실이 아닌 듯했다. 최고의 캐스팅과 완벽한 제작으로 저마다 베스트 공연을 만들어내며 뜨겁게 경쟁하던 그들, 역시 뉴욕은 공연예술의 세계 수도였다.

장일범 음악평론가, KBS클래식 FM '생생클래식' DJ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