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힐, 슈퍼 히어로> 展 하이힐을 둘러싼 섹시하고 활기찬 상상

Mother's milk
"굽에 대해서 말하자면, 높아야 한다. 구두는 신는 그 순간 변화를 일으킨다. 그것은 연극의 반전과 같다. 구두의 높이는 당신의 도발적인 감정의 수위와도 직결된다. 높게, 높게, 더 높게!" – 마놀로 블라닉

라엘리안의 환상이 현실이 되어 우주인들이 지구를 되돌려 받겠다고 말하며 지구의 문화를 한 눈에 알 수 있는 물건을 007 가방에 넣어 보내라고 한다면, 그 속에 아이폰보다 먼저 들어가야 할 것이 하이힐이라는 데 반대할 사람이 있을까?

패션을 위해 소비되는 물건 중 하이힐만큼 많은 상징성을 달고 다니는 것은 없다. '하이힐 신고 사다리 오르기', '하이힐 신고 독서하기', '하이힐을 벗어 던져라' 같은 카피들은, 각기 다른 의미로 쓰였을지언정 듣는 사람들은 얼추 알아 들으니 신통하다.

여성성의 정수, 쇼핑 중독, 성적 유혹, 미에 대한 강박, 아름다움을 무기로 사용하고자 하는 여자의 절박한 야망. 빨갛고 뾰족하고 반질거리는 하이힐은 남성 중심의 사회를 향한 여자들의 전쟁 선포이기도 하고, 또 완전히 반대로 남자들의 미적 기준에 맞추기 위해 끙끙대는 여자들의 수동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 보기도 좋고 떠들기도 좋은 주제는, 그래서 미술, 문학, 공연 등 문화 예술 전방위에 걸쳐 즐겨 거론돼 왔다. 무엇을 말하든 하이힐만 끼워 넣으면 담론은 한층 섹시해지고 젊어지며 활기를 띤다.

김민형 작가의 <슈퍼 힐, 슈퍼 히어로> 전은 이 중 힐의 탁월한 미적 효용성에 대해 주목했다. 신기만 하면, 아니 그 위에 오르기만 하면 못해도 7cm 이상 훌쩍 커지는 하이힐은 작가에게 있어 슈퍼맨의 스판 유니폼과 빨간 팬티 그 이상이다.

한결 가늘어진 종아리와 긴 다리, 올라 붙은 엉덩이에 꽂히는 타인의 시선은 생각보다 무시무시한 중독성을 가지고 있어 무지외반증을 경고하는 기사에도 불구하고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발가락 고문 기구에 오르도록 종용한다. 집에 도착해 힐에서 내려오기 전까지는 어쨌든 그녀는 이 사회의 가진 자, 승리자, 슈퍼 우먼이니까.

신기만 하면 나도 슈퍼 우먼

전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일상 속에서 하이힐이 포함된 장면을 다양하게 포착한다. 한낮의 명동, 작가는 하이힐을 신고 뛰는 한 여성을 목격한다. 천지를 울리는 또각또각 소리는 말발굽 소리와 겹쳐지고 그녀의 유달리 발달한 종아리는 말 다리의 근육를 연상케 한다.

여기에는 '또각또각'이라는 제목과 함께 '하이힐이 말이 돼?'라는 중의적 부제가 붙는다. 만들어 놓고 그 한껏 다리를 벌린 모습을 감상하고 있자니 어쩐지 힐의 바닥이 흡사 강아지의 배와 닮은 것을 발견한다.

또각또각(하이힐이 말이 돼?)
어릴 적 현관에 놓인 엄마의 하이힐로 엄마의 부재 여부를 확인했던 기억을 밑천 삼아 하이힐에 모성을 부여, 바닥에 여덟 개의 젖꼭지를 달아준다.작가가 부여하려던 것은 모성이지만 굽의 높이만큼 바짝 들어올려진 엉덩이와 분홍빛 젖꼭지는 섹스, 체위, 수간에 이르는 말할 수 없이 관능적인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하이힐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능미는 'inside story – flower'로 더 노골적으로 표현 되는데 하이힐에 발을 집어 넣는 행위가 성행위와 일치한다는 사회 심리학자들의 말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여성의 질 같기도 꽃 같기도 한 힐의 입구는 연분홍 빛으로 공들여 채색돼 마치 소녀의 은밀한 곳을 나타내는 것 같아 더 자극적이다.

늘 붙어 다니는 관능미 말고도 힐과 여성을 엮는 고리는 수없이 많다는 사실을 작가는 그 밖의 작품들을 통해 확인시켜 준다. 풀어내고 풀어내도 끝이 없는 여자들의 수다는 '수화기 힐'로 표현되었고, 여자들의 숙명인 가사 일은 공업용 수세미로 만든 거대한 하이힐로 치환된다. 의자 모양의 힐은 여자들로 하여금 앉아서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니 아이러니하다.

마지막으로 '소비심리를 자극하는 55개의 드로잉'에서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껏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었다. 하이힐을 신은 스파이더 맨, 작가가 직접 복용하는 다이어트 약으로 만든 티팬티 모형, 쩍 벌어진 무화과, 아래 부분이 살색으로 채색된 서양 배 등등. 물론 그 앞에서 상상은 자유다.

갤러리 AG, 2월12일까지.

inside story - flower
김민형 작가 "하이힐을 만드는 이유가 신는 이유"

- 하이힐을 소재로 작업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 사람들 중 직접 하이힐을 신는 사람은 드물더라.

하이힐을 소재로 삼은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첫 번째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내가 하이힐에 주목하는 이유는 내 자신이 하이힐의 소비자이기 때문이다. 만드는 이유가 신는 이유와 같다. 키가 작은 탓에 힐에 관심이 많다. 일상에서 힐을 마주칠 때마다 떠올리는 연상을 이미지화하고 싶었다.

- 하이힐을 몇 개나 가지고 있나. 그냥 신발 말고 굽이 높은 구두만 따졌을 때.

겨울에 신는 것만 50켤레 정도다. 그것도 엄마가 철 지난 구두는 많이 버려서 그 정도다. (웃음) 특별히 브랜드를 따지지는 않고 지나가다가 예쁘면 싸건 비싸건 그냥 사버린다.

- 신으면 슈퍼 우먼이 된다거나, 또각또각 소리에서 말 발굽을 떠올리는 것은 건전한 상상인데, 이상하게 작품 전반적으로 공격적일 만큼 관능적인 느낌이 난다.

dream hill
성적인 코드를 굳이 강조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은연 중에 만드는 사람의 생각이 배어 나오는 것 같다. 하나의 작품이 한 가지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라 다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내가 의도한 바를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관객이 거기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단 작품은 만들어지고 나면 작가의 손을 떠난 셈이니까.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