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프랑스 정원>, 영화 <델마와 루이스> 등 이브의 극단적 선택

<핑크&블루 프로젝트>, 소유한 물건을 통해 소비사회 이면의 권력구조를 꼬집는 윤정미 작가. 'RED FACE'라는 제목의 2005년도 작품이 있다.

거울 앞에서 립스틱으로 글씨를 쓰며 붉게 변해가는 자신의 얼굴은 담은 네 컷의 사진이다. 수건으로 머리를 말아 올린, 화장기 없는 얼굴 위에, 작가는 이마에서부터 턱까지 붉은 글씨를 쓰기 시작한다.

MOTHER, WOMAN, WIFE… 태생적으로 혹은 선택에 의해 자신에게 부여된 수많은 '역할'들이 그녀의 얼굴을 뒤덮는다. 쓰여지고 지워지고, 다시 쓰여지며 얼굴은 붉은 글씨로 온통 새빨개졌다. 누가, 무엇이 그녀를 숨막히게 하는가.

사회의 시스템을 유지한다는 것은 실상 무서운 일이다. 시스템의 구성원은 끊임없이 사회 유지를 위한 가치를 주입 당하고 개인은 그룹 지어져 분류된다.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이들은 사회적 나부랭이로 취급 받기 십상이다. 이 부류에 속하지 않으려면 발버둥이라도 치라고 시스템 속의 불특정 다수는 말한다.

현대사회에서 여성은 더 많은 선택권을 갖게 됐지만 동시에 많은 짐을 얻었다. 커리어우먼, 알파걸, 골드미스… 자본주의 시대가 부여한 물질이라는 가치 속에서 남성들과 경쟁하는 여성들은 이 같은 신조어로 규정지어졌지만 정작 개인의 존재란 없다. 결혼 역시 더 이상 모든 여성의 의무가 아닌 게 되었지만, 동시에 직장이 없으면 결혼을 할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영화 '델마와 루이스'
자신에 대해 채 알기도 전에 '자아실현'에 대한 강박증에 시달리고 정신적 허기는 공백인 채로 남겨져 있다. 설상가상으로 여성의 몸은 청순 글래머, 꿀벅지, 애플힙 등 타자의 시선으로 대상화되고 남성들의 입맛에 따라 차등화되기까지 한다.

몸은 자유롭되, 의식은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숨막히는 사회적 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는 여성들에게 극단의 선택을 제시하기까지 한다. 죽어서 자유롭거나, 감옥에 갇히거나. 옥죄는 듯한 남편의 간섭과 반복된 일상에 갇혀있던 두 여자는 영화 <델마와 루이스>에서 영원하지만 가혹한 자유를 선택한다. 자신을 폭행하거나 강간하려 하는 남자들을 살해하면서 연쇄살인범이 된 여자 이야기 <몬스터>의 끝은 감옥에서의 죽음이었다.

여기 7명의 죄수와 3명의 감시자가 있다. 비록 죄수와 간수, 소장으로 나뉘어져 있지만 그들 모두는 감옥에 묶인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을 옥죄는 것은 감옥보다 '가족'과 '판타지'라는 굴레다. 연극 <프랑스 정원>에서다.

두 쌍의 가족들로 구성된 죄수들은 모두 친족 살해의 죄로 사형을 언도 받은 여자들이다. 살인죄를 지은 그들은 가해자이자 동시에 피해자였다. 아버지이자 남편인 남성은 반복적으로 폭력을 감행했고, 조카의 몸을 유린했으며, 혼외정사로 다른 여자를 임신시키기까지 했다. 현실을 참을 수 없는 여성들은 결국 남편을, 아버지를, 이모부를 죽이고 자신들도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린다.

모녀 지간으로 이루어진 한 가족의 실질적인 리더는 의아하게도 막내딸이다. 심지어 엄마와 언니들은 그녀를 두려워하기조차 한다. 왜 그럴까. 실질적인 살인의 공모자는 막내를 제외한 세 명이지만, 단지 가족이라는 이유 때문에 막내딸도 감옥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 같은 설정은 가족이 어떤 경우에도 벗어날 수 없는 운명공동체라는 점을 시사한다.

영화 '몬스터'
가족 구성원의 한 명을 해침으로써 가족을 지켜낸 모순의 고통을 견디기 위해 그들이 선택한 것은 현실 도피다. 엄마는 사건이 일어났던 시간에 여의도에 갔다고 자신의 기억을 조작한다.

큰 언니는 베개를 배에 넣고 임신을 했다고 주장하며 산다. 몽유병이 있는 둘째는 늘 프랑스 정원을 그리며 출소를 꿈꾼다. 여의도와 출산, 프랑스 정원의 판타지는 감옥이라는 현실을 기피함으로써 현재의 고통을 잊으려는 시도에서 비롯된다.

특히 엄마는 두 딸들의 현실도피를 알면서도 모른 척한다. 딸들의 병적 증세는 곧 가족의 붕괴, 해체를 의미하기 때문. 사형을 언도받은 운명이면서도 그들은 굳건히 가족이라는 끈을 놓지 않고 있다. 그런 가족이 지긋지긋한 막내딸도 결국은 그들과 같은 운명을 맞을 수밖에 없는 가족의 일원이다.

부녀 관계인 교도소장과 두 간수 역시 일그러진 가족상을 보여준다. 소장은 공적으로는 이 여자교도소의 유일한 남성이지만, 작품 속에서는 동시에 모든 여성들 위에 군림하는 억압자로서의 존재다. 전통적인 아버지의 역할과 모습 대신 복장 도착자로서 살아가는 아버지. 한 남자를 두고 이전투구를 벌이는 자매들은 아버지가 하달한 명령을 자신에게 주입하며 마음의 감옥에 갇힌 채 살아간다.

세 무리의 가족들로 구성된 감옥 안의 사람들은 오늘도 함께 구덩이를 판다. 구덩이는 바로 그들 자신이 들어갈 무덤.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굴레가 지워진 듯 그들은 담담히 무덤 파기 작업을 반복한다.

연극 '프랑스 정원'
'감옥'이라는 굴레는 가족의 질긴 운명과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갈 수 없는 현실을 가리키고, '무덤'은 과거와 현재를 알지 못한 채 미래를 향해 있는 것, 즉 현실도피를 가리킨다. 둘째 딸이 꿈꾸는 프랑스 정원과 그들이 파는 구덩이는 상극인 동시에 동의어가 되기도 하는 이유다.

'그대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있다'는 내용의 샹송 '오! 샹젤리제'가 감옥에 울려 퍼진다. 답답하고 음침한 감옥 속에서 들려오는, 지나치게 우아하고 낭만적인 노래는 참으로 역설적이다.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