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B언소>, <비정규 식량 분배자>, 무용 <제7의 인간>속 현실 비판과 성찰

연극 'B언소'
사람들은 때로 현실을 잊기 위해 극장을 찾지만, 그곳에서 더 적나라한 현실을 만나기도 한다.

풍자극이나 블랙 코미디가 그렇다. 현실에의 통렬한 비판과 성찰은 정신을 번쩍 들게 하지만, 그저 직시만 해서야 연극이 아니라 사회면 뉴스가 되고 만다.

훌륭한 풍자극의 요건은 현실에의 통찰력을 갖추되, 그것으로부터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균형 감각이다.

2003년 재공연에 이어 6년여 만에 다시 무대에 올려지고 있는 의 인기는 그런 통찰력과 간격 유지의 균형 감각에서 비롯된다.

1996년 초연 당시 평균 객석 점유율 120%를 상회할 정도로 뜨거운 화제를 몰고 왔던 이 작품은 '배설의 공간'인 화장실을 통해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여주며 웃음을 유발하는 풍자극이다.

현대무용 '제7의 인간'
작품의 개성은 제목에서 나온다. 더 구체적으로는 제목으로 설정된 비언소(변소)다. 유언비어의 비언(蜚言)이 난무하는 변소는 뱃속에 담긴 것들을 배설하는 장소다. 거기에 어떤 순서나 가치는 없다. 단지 쏟아낼 뿐이다. 다만 10여 년 전에도, 6년 전에도 당시의 사회상을 풍자했던 연극은 이번에도 '핫 이슈'를 섭렵해 시의성을 갖췄다.

가령 마이크를 든 배우가 내복 착용을 권유하며 '저탄소 녹색성장'을 운운하는 것은 정부의 공익광고를 금세 연상시킨다. 첫 번째 칸과 두 번째 칸 앞을 애매하게 걸치고 기다리고 있는 앞의 남자에게 뒤의 남자가 "어느 쪽에 선 거냐, 좌냐 우냐" 하고 묻자 앞의 남자가 "중도다!" 하고 받아치는 장면은 '피식' 하는 웃음을 자아낸다.

또 "빨래를 안 빨았다"고 항변하는 남자를 '좌빨'로 몰아 쫓아내거나 '문화예술은 혁명수단'이라는 비언의 난무는 근래의 화두였던 황지우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이나 김정헌 한국문화예술위원장을 떠올리게 한다.

정신없는 비언들로 변소가 더럽혀진 끝에 등장하는 청소부 아줌마는 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한다. 청소의 임무를 띠고 온 '비언소의 여왕'이 "더러운 세상, 더러운 놈들"을 연발하다 쓰레기통을 걷어차버리는 것. 온갖 오물들로 가득찬 무대는 결국 더러운 욕망과 허위의식이 판치는 세상에 대한 은유가 된다.

프로젝트그룹 극단 이안이 지난달부터 공연 중인 <비정규 식량 분배자>는 대한민국에 전쟁이 발발했다는 가정 하에, 전쟁을 피해 덕수궁 인근 지하로 숨어 든 7명의 식량 쟁탈전을 그리고 있다.

연극 '비정규 식량 분배자'
이 작품은 극한 상황에 놓인 인간의 참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전쟁과 생존이라는 주제는 일견 심각해질 수도 있지만, 실제로 그 상황에서 각 인물들은 초코파이 하나를 두고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을 리얼하게 보여준다.

폭격을 피해 무작정 대피한 덕수궁 인근 빌딩 지하에 나흘째 갇혀 있는 남녀 7명은 '먹고 싸는' 기본적인 문제에 천착하며 치졸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제목인 '비정규 식량 분배자'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식량과 물이 떨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분배가 시작되고 그것이 곧 특권이 되는 상황을 표현한 것. 급기야 초코파이 몇 개와 초콜릿 등만 남자, 인간들은 생존을 위해 이전투구 양상을 보이게 된다.

오경택 연출가는 "극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은 웃음을 자아내지만 어느 순간 문득 저게 바로 내 모습이란 깨달음을 갖게 될 것"이라며 "결국 그런 상황에서 인간이 이성과 본능 사이에서 인간성을 지켜낼 수 있을까를 묻고 싶었다"고 연출 의도를 설명한다.

한편 10일부터 이틀간 무대에 오르는 정영두 안무의 <제7의 인간>은 춤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이주노동자의 삶을 다뤄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주자의 삶이라고 해서 곧바로 외국인 노동자를 떠올려서는 금물이다. 정영두 안무가가 그리는 이주자란 가족이나 고향, 직장과 나라에서 떠나고 머물기를 강요받는 사람들이다.

'제7의 인간'이란 원래 헝가리 시인 아틸라 요제프(Attila Jozsef)의 시 제목으로, 정 안무가는 이 단어를 모든 권력들로부터 소외받고 의무만 강요받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또 이 단어는 영국 작가인 존 버거(John Berger)와 사진작가 쟝 모르(Jean Mohr)가 유럽 이민노동자의 체험을 다큐멘터리 기록 형식으로 담아낸 책의 서두에도 나와있는데, 정영두는 바로 이 책에서 이번 작품의 영감을 얻었다.

그는 이 책에서 현대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인간의 삶이 어떤 것인지, 그 개개인이 어떠한 내밀한 감정들을 경험하는지에 주목했다. "떠나고 머무는 것을 통해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회적이고 개인적 현상들, 그리고 그런 현상들을 통해 형성된 인간의 정신과 몸은 어떤가에 관한 이야기를 펼쳐낼 것이다."

거대 담론이나 난해한 실존 철학에 매달렸던 현대극이 삶에 대한 치밀한 탐구를 통해 관객 개인의 삶 속으로 들어오고 있다. 그것은 때로는 '더러운 세상'을 조롱하고 인간 본성의 한계를 비판하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관객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