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분홍치마 봄바람에>왕실대표 야외공연 전통과 시대변화 맞춘 '신복합문화놀이축제' 가능성 찾기

2010 산대희 <연분홍치마 봄바람에> 장사익
널따란 무대 뒤를 가득 메운 정교한 무대구조물이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한다.

마치 거대한 성을 연상시키는 이 구조물 사이에서 남녀 배우가 부르는 노래는 자신들의 위태로운 처지를 더욱 생생하게 표현한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의 에스메랄다와 콰지모도의 듀엣은 이런 모습을 다룬 전형적인 장면이다.

공연에서 커다란 구조물의 역할은 뭘까. 당연하게도 관객의 시선을 끌기에 효과적이라는 점이다.

대형 구조물을 탄 배우는 평면 무대에 섰을 때보다 동적인 서사성을 지닌다. 무대장치와 어우러진 배우의 노래와 연기, 춤은 그 자체로 하나의 그림,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이런 구조물을 이용한 공연은 서양의 공연 장르보다 우리가 수백 년 더 빨랐다. 신라 진흥왕 때 시작돼 고려와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던 산대희(山臺戱)가 그것이다. 산대희란 '산 모양의 구조물에서 벌이는 연희'라는 뜻으로, 전설 속에 등장하는 삼신산(三神山)을 형상화한 산대(山臺)에서 펼쳐지는 가무백희를 가리킨다. 진흥왕(6세기) 때 기록이 있을 정도이니 오페라의 탄생(16세기)과 견주어도 천 년이나 앞선 것이다.

산대희는 정월대보름이나 연등회 등 국가경사와 외국의 사신을 맞이할 때, 왕실에서 행해졌던 대표적인 축제로 주로 야외에서 공연되었다. 하지만 국가적 행사였던 만큼 600여 명에 달하는 광대가 참여했던 당시의 산대희는 지나친 경비 소모와 풍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조선 중기 인조반정 이후 급격히 자취를 감추었다. 언뜻 오늘날의 브라질 삼바축제를 연상시키는 국민축제의 가능성도 이때 함께 사라졌다.

문헌상으로만 전해오던 산대희가 복원된 것은 약 200여 년만인 지난 2004년 '실학축전' 행사에서였다. 이후 산대희는 정월대보름에 국립국악원 예악당과 앞뜰에서 그 명맥을 이어왔다. 관객들의 반응도 좋았지만 특정한 날, 특정한 장소에서만 볼 수 있는 낯선 이름의 공연은 원래의 매력을 만끽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었다.

그래서 전통공연 장르의 보고(寶庫)로서 산대희의 가능성은 계속해서 제기되어 왔다. 충무아트홀이 오는 14일 '개관 5주년 기념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여는 <연분홍치마 봄바람에>는 이런 산대희의 가능성을 현대적 공연 관점에서 모색하는 자리여서 눈길을 끈다. 과거의 산대희가 야외에서 벌어진 전통적인 산대놀음이었다면, 이번 '2010 산대희' 공연은 전통은 그대로 살리면서 극장공연으로서의 산대희 형식으로 새롭게 접근하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최초의 프로시니엄 무대인 원각사(1902년)보다 400년 앞선 1510년, 조선의 동대문 근처에 프로시니엄 무대와 같은 왕립극장이 세워졌다면 오늘날 어떤 형태로 진화했을까. 이 공연은 이런 유쾌한 상상에서 출발한다. 공연의 콘셉트 역시 그 상상이 현실이라는 전제하에 '왕실극장 개관 500주년 기념공연'으로 잡았다.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그 공연에 초청된 귀족이 되는 셈이다. 공연관계자는 "이번 공연의 콘셉트는 고전적인 산대놀이의 의미를 되새김과 동시에 21세기의 형식에 맞춘 '신복합문화놀이축제'로의 가능성을 찾기 위한 자리"라고 설명했다.

지난달 정월대보름에 공개된 리허설 현장은 그런 새로운 산대희를 엿볼 수 있는 자리였다. 정은혜 무용단의 화사하고 우아한 춤으로 시작된 공연은 국립창극단의 간판스타 박애리의 '쑥대머리' 열창으로 생동하는 봄의 기운을 표현했다. 이번 공연의 총 지휘를 맡은 유영대 예술감독을 비롯해 자리에 모인 제작진은 "자알 한다~!" 하고 감탄을 연발했다. 이어진 해금 연주와 독무는 산대희의 다양한 재미를 구성하는 알찬 프로그램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우리 시대 최고의 가객이자 '영혼의 소리꾼'으로 불리는 장사익 선생은 공연의 타이틀 격인 노래 '봄날은 간다'를 특유의 구성진 음색으로 들려줬다. '연분홍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로 시작하는 노래는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하는 대목에선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입을 같은 모양으로 만들고 있었다. '봄날은 간다'는 장사익 선생에 이어 나온 무용단이 보여주는 춤 작품의 소제(小題)이기도 했다.

기존의 산대희의 모습과 새로운 산대희의 변신을 모두 기대하게 했던 리허설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하나는 우리 춤과 소리라는 1부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의 산대놀음을 볼 수 있는 2부다. 특히 기존의 산대희에 이어 신명난 줄타기 묘기를 보여준 인간문화재 줄타기 보유자 김대균과 김원민이 이끄는 연희패 꼭두쇠의 산대놀이, 경기소리 인간문화재인 김혜란 명창의 소리가 2부에서 극장으로 들어온 산대놀이의 새로운 면모를 선보이게 된다.

각각 입춘과 대길로 나뉘어진 1, 2부는 결국 봄이라는 테마를 통해 객석과 무대를 넘나들며 관객과 배우를 하나로 만들기 위한 산대희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각각 1, 2부의 소제인 호풍환우(呼風喚雨, 바람이 언 땅을 녹이고, 빗줄기에 새싹이 돋는다)와 연비어약(鳶飛魚躍, 새들과 짐승, 물고기가 역동적으로 움직인다)이 입춘대길의 뜻을 오롯이 담아내고 있다.

명창 김혜란
박애리의 소리와 어우러지는 이인무, 독무, 그리고 장사익의 노래에 붙여진 이름이 각각 '춘야연'과 '도리원'인 것은 이태백의 명문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에서 빌려온 것. 결국 이 공연은 이태백의 글귀를 빌려 "이 귀한 봄을 얼마나 정성스럽게 맞아야 하는가"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유영대 예술감독은 "지금까지 마루나 마당에서 펼쳐진 산대희 공연들이 몇 차례 있었지만 좀 느슨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번 <연분홍치마 봄바람에>는 프로시니엄 무대환경에 맞게 꽉 짜인 첫 번째 산대희 공연이 될 것"이라고 강조하며 "반주음악을 비롯해 대부분의 곡을 현대적 감각으로 작·편곡해 대중과 소통할 수 있게 중점을 뒀다"고 설명했다.

야외극에서 실내무대극으로 다시 태어나는 산대희는 유쾌한 상상에서 출발했지만 동시에 우리가 그동안 잃어버린 것을 돌아보게 한다. 유 예술감독 역시 "이번 공연이 '결국 우리가 이어가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고민하게 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히고 있다.


명창 박애리
평안감사 향연
산대희 포스터
산대탈 놀이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