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년 전통의 연출가 동인, 선후배 '연출 열전' 10개월간 대장정

'혜화동 1번지 페스티벌' 중 <가정식 백반>
한쪽에선 살아나고 있다고 자축하지만, 한쪽에선 죽어가고 있다고 한탄한다. 이들의 시선은 모두 한 곳을 바라보고 있기에 더 이상한 노릇이다.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일까.

작품보다는 마케팅에 초점이 맞춰지는 연극계의 현실에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연극의 실험정신을 되살리려는 움직임도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실험에만 경도된 연극을 하기에 관객들의 입맛은 이미 최근의 스테디셀러 연극들에 길들여져 있다.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문제작이면서도 작품의 질이 보장되어 있는 안전한 선택은 없을까.

'릴레이 갈라 연극' 마련한 혜화동 1번지

'2010 혜화동 1번지 페스티벌'은 그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혜화동 1번지 페스티벌은 국내 유일의 연출가 동인 집단인 '혜화동 1번지'가 주최하는 행사로, 그동안 같은 기수 연출가들의 작품을 모아 매회 두 달 안팎의 페스티벌을 열어왔다. '혜화동 1번지'는 상업적 연극에서 벗어나 개성 강한 실험극을 보여주겠다는 연출가들이 1994년 결성한 모임으로, 현재 4기까지 이어지고 있다.

'혜화동 1번지 페스티벌' 중 <72시간>
하지만 올해 페스티벌은 새로운 모습으로 마련됐다. 지난 16년간 혜화동 1번지를 거쳐간 모든 기수의 연출가가 대거 참여해 장장 10개월간의 무대를 이어가는 것. 2008년 기획해 오랜 시간 공연을 준비해 왔다는 이 공연 관계자는 "연출가가 중심이 되어 유지되어 온 '혜화동 1번지'의 동인제에 중요한 방점을 찍을 것"이라며 의미를 부여하고 "선후배가 함께 모여 작업을 진행함으로써 시너지를 발휘할 것이라 믿는다"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먼저 눈길이 쏠리는 것은 역시 현재 대학로를 이끌고 있는 선배들의 이름이다. 이윤택, 박근형, 박장렬로 이어지는 선배들의 계보는 그대로 현재 한국 연극의 연출가 계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비록 오프 대학로의 위치에 있는 '혜화동 1번지'이지만 이번 페스티벌만큼은 '연출열전'이라고 불려도 될 만큼 쟁쟁한 경쟁력을 과시하고 있다.

10개월간의 대장정인 만큼 이번 페스티벌은 무려 '시즌제'를 도입했다. 먼저 출격하는 것은 선배들의 <여기가 1번지다> 13편이다. 기국서, 류근혜, 이윤택, 채승훈(이상 1기), 박근형, 손정우, 최용훈, 이성렬, 손정우(이상 2기), 김낙형, 박장렬, 송형종, 오유경(이상 3기)이 교대로 자신들의 작품을 선보인다. 김재엽, 김한길, 김혜영, 박정석 등 4기 후배들이 나서는 시즌2 <1번지 혈전>은 현재 혜화동1번지를 운영하는 세대들의 이야기를 무대 위에 펼쳐놓는다.

하지만 시즌제라고 해서 시즌1이 끝나고 다음 시즌이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4기들의 시즌2 작품은 선배들의 공연 사이에 포진해 동일선상에서 관객의 평가를 받게 됐다. 이번 페스티벌의 목적은 선후배간의 치열한 경쟁을 통해 상업화되는 대학로의 시류에서 벗어나 연극정신의 대안을 모색하자는 데 있기 때문. 관객 입장에서는 이런 거창한 의미를 떠나 명 연출가들의 작품을 연이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현대연극사 보여주며 대학로 연극 방향 제시

'혜화동 1번지 페스티벌' 중 <수업>
스타트를 끊은 것은 동시대를 대표하는 연출가인 이윤택 연희단 거리패 예술감독이었다. 그는 <고도를 기다리며>, <하녀들> 등과 함께 부조리극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오네스코의 <수업>을 올리며 소통부재의 세계 속에서 저질러지는 싸이코 패스의 폭력성을 그려냈다. <수업>은 최근 잇따라 벌어지는 싸이코 패스 범죄 사건과 맞물려 관객의 비상한 관심을 이끌어냈다는 평가를 얻었다.

바통을 이어받는 사람은 현 서울연극협회 회장인 박장렬 연극집단 反 상임연출이다. 4월 1일부터 무대에 오르는 <72>시간에서 그는 붕괴사고로 무너진 막장에 갇혀 죽어가는 두 광부의 72시간의 행적을 쫓는다. 그는 작품의 '갇힌 상황'을 통해 오늘날 현대인의 원죄 의식과 내면의 추악성을 그려낼 예정이다.

뒤를 이어 박근형 연출의 <오이디푸스 왕>, 송형종 연출의 <콜렉션>, 최용훈 연출의 <가정식 백반 맛있게 먹는 법>, 박찬빈 연출의 <천대받는 자와의 밤의 대화>, 이성렬 연출의 <야매의사>가 차례로 무대에 오른다. <1번지 혈전>에 속하는 김한길 연출의 <임대아파트>와 김재엽 연출의 <타인의 고통>도 시즌1 작품들 사이에 배치돼 관객들과 만난다.

이번 페스티벌의 예술감독을 맡은 1기 김아라 연출은 "이번에 모인 연출가와 작품을 통해 현대연극의 굵직한 흐름을 가늠해 볼 수 있고, 극작가들의 다양한 관점을 통해 현대사의 굵직한 테마도 읽을 수 있는 기회"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어서 그는 "혜화동 1번지는 이 세상에 끊임없이 반항하며 변화와 대안을 제시하는 좌충우돌의 현장으로서 그 진가를 발휘할 것"이라며 이번 공연을 즐겁게 지켜봐 달라고 당부했다.

이번 페스티벌은 16년의 짧지 않은 역사를 돌아보고 미래를 가늠하려는 취지에서 출발했지만, 동시에 상업적인 연극계의 행태에서 벗어나 대안적인 공연을 모색하는 장도 된다. 관객에게는 명망 있는 연출가와 유망한 연출가들의 작품을 연이어 맛보며 한국연극이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혹은 가야 하는가를 읽을 수 있는 자리가 된다.

이윤택 연출

박장렬 연출
김아라 예술감독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