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ss in Cinema] (3) <위대한 독재자> 속 <헝가리 무곡 5번>브람스의 음악에 맞춘 채플린의 동작 두 소외계층 영혼의 결합

찰리 채플린이 감독, 제작, 각본, 주연을 맡은 영화 <위대한 독재자>는 예술가로서 채플린의 놀라운 창의성과 천재성을 보여주는 명작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토매니아 제국의 유대인 병사 찰리는 독일군 장교 슐츠를 구하다 비행기 추락사고로 기억상실증에 걸린다.

그 후 몇 년간을 정신병원에서 보낸 그는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때 토매니아 제국에서는 힌클이라는 독재자가 유대인을 탄압하고 있었다.

찰리는 힌클의 군대에 맞서다 처형당할 뻔하지만 슐츠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다. 한편 힌클은 오스테를리히를 침략하기 위해 박테리아국의 독재자 나폴리니와 협상을 벌인다.

<위대한 독재자>에서 채플린은 독재자 힌클과 이발사 찰리 역을 동시에 연기한다. 힌클과 찰리는 서로 상반된 캐릭터를 가진 인물이지만 장면이 바뀔 때마다 변신을 거듭하는 채플린의 연기는 소름끼칠 정도로 완벽하다.

물론 영화에서 힌클과 찰리는 둘 다 코믹한 인물로 그려진다. 하지만 그 양상이 전혀 다르다. 이발사 찰리의 코믹한 행동에 매우 영민하고 발랄한 메시지가 숨어 있는 반면, 독재자 힌클의 코믹한 행동에는 그를 비웃음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채플린의 치밀한 의도가 숨어 있다.

과장된 억양의 엉터리 독일어로 연설을 하는 장면에서 끝이 딱 막힌 것 같은 독일어 발음을 기침과 연결한 것이라든가 세계 지배를 꿈꾸는 힌클이 지구의를 가지고 놀다가 마지막에 지구의가 터져버리는 장면을 보면 채플린이 이 아둔한 인물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위대한 독재자>에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 많이 나온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이발사 찰리가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5번>에 맞추어 손님에게 면도를 해주는 장면이다.

"행복의 시간입니다. 당신의 일을 기쁨으로 만들어 보세요. 음악에 맞추어 움직여 보세요."

라디오에서 이런 멘트와 함께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5번>이 흘러나오자 때마침 손님을 맞은 찰리는 음악에 맞추어 몸을 움직인다. 첫 소절이 연주될 때는 면도용 거품(foam)을 만들고, 면도날을 간다. 그리고 두 번째 소절부터 박자에 맞추어 얼굴에 거품을 바르기 시작한다. 이어서 나오는 네 개의 크레센도. 능숙한 동작으로 음악에 맞추어 네 번 면도를 하고, 빠른 음형이 나올 때는 면도날을 수건으로 닦는다. 이발도구를 다루거나 면도를 하는 찰리의 동작이 음악에 그야말로 착착 달라붙는다.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은 집시 스타일의 음악이다. 낭만주의 시대의 고전주의자로 불리며 늘 점잖고 진지한 음악만 썼던 브람스가 이렇게 본능에 충실한 집시 음악을 썼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아마 그는 집시 음악에 깃든 짙은 음영과 강렬한 에너지에 매료되었던 듯하다. 그런데 왜 제목을 집시 무곡이라고 하지 않고 헝가리 무곡이라고 했을까.

19세기 유럽에서는 집시에 대한 인식이 아주 안 좋았다. 난폭하고 불결하고 풍기문란하고 도둑질이나 일삼는 집단이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었다. 그래서 집시를 추방하거나 배척하는 나라들도 많았다. 독일에서는 집시를 발견하면 즉시 죽여도 좋다는 명령이 내려지기도 했으며, 프랑스에서도 집시들을 전멸시키려는 계획이 있었다.

하지만 영국이나 오스트리아 같은 나라에서는 집시에 대한 유화정책을 펴기도 했다. 가능하면 집시에게 직업을 갖도록 했으며, 이렇게 해서 직업을 가진 사람은 집시를 의미하는 '지고이네르'라는 이름 대신 신농민 혹은 신 헝가리인이라고 부르도록 했다. 브람스가 자신이 작곡한 집시 스타일의 음악에 '헝가리'라는 제목을 붙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은 소외된 자들의 음악이다. <위대한 독재자> 역시 소외된 자들의 영화이다. 집시와 유대인.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사회적 편견의 희생양이 되었던 사람들. 채플린은 유명한 이발소 장면에서 이 두 소외계층의 영혼을 결합시켰다.

유난히 작은 키와 짧은 팔다리, 구부정한 어깨와 전체적으로 조화가 안 맞는 비례를 갖고 있는 채플린의 몸. 이렇게 불완전한 그의 몸은 그 자체가 집시와 유대인, 아니, 더 나아가 세상 모든 소외계층을 대변하고 있다.

핍박받고 짓눌린 유대인의 몸이지만, 소외되고 고통받는 집시의 음악이지만, 이발소 장면에 나오는 채플린의 몸과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은 전혀 소외와 고통의 흔적을 보여주지 않는다. 브람스의 경쾌한 음악에 맞추어 깔끔하고 적절하게 구사되는 채플린의 동작은 그 소외의 역사가 또 다른 창조의 에너지라는 것을, 몸과 음악을 통해 세상을 통렬하게 비웃어줄 수 있는 날카로운 풍자의 원동력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글 진회숙 (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