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아트프리즘틀에 박힌 정상인의 세계와 완전히 다른 새로운 세계 제시

막스 에른스트, 주인의 침실
꿈은 대부분의 경우 비현실적이다. 꿈에서 나오는 온갖 장면들은 비논리적인 시공간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다.

심지어 전개되는 사건들이 기본적인 일관성조차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주장한 시간의 일치, 장소의 일치, 등장인물의 성격의 일치 중 어느 것 하나 기대하기가 어렵다.

꿈속에서 나는 꿈꾸고 있는 바로 그 순간을 살다가 갑자기 어린 시절의 나로 둔갑하기도 한다. 도시의 어느 번잡한 길 한 복판에 있다가 어느 순간 집안에 있기도 하다.

나와 마주하고 있던 사람이 동생이었는데, 어느 순간 그 사람은 생전 본 적이 없는 낯선 사람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이 모든 불일치는 꿈이니까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꿈을 비현실적인 공상으로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꿈은 넌센스(무의미)로 이루어진 세계인 셈이다.

정말 꿈은 무의미의 세계일까?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드나 라캉의 대답은 다르다. 이들에 따르면 꿈은 분명히 비현실적인 세계이지만, 단순한 가상이나 비실재가 아니다. 오히려 꿈이야말로 실재(real) 세계이다. 왜냐하면 꿈은 자아에 의해서 억압되지 않는 무의식의 충동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현실에서 우리는 의식이라는 가면으로 마음속 깊은 본래의 모습을 감추고 있는 반면, 꿈에서는 그러한 가면을 벗어던지고 마음껏 우리의 내면을 펼쳐 보이는 것이다. 현실세계가 질서와 규범이라는 위선으로 둘러싸인 반면 꿈의 세계는 그러한 질서와 규범으로부터 벗어나있는 셈이다.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그림은 비현실적이다. 그들은 꿈의 세계나 어린아이 혹은 광인이 보는 세계를 그리고 있다.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정상인들의 시각을 외면하는 이유는 정상인들이야말로 원래 현실세계가 공허라는 공포를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막스 에른스트(Max Ernst)의 그림 "주인의 침실"(Das Schlafzimmer des Meisters, 1920년)은 현실세계 자체가 하나의 공허한 공간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마치 원근법을 극대화시킨 듯한 공간적인 깊이는 우리의 안락한 시선을 방해한다. 더군다나 화면 깊숙한 곳에 위치한 동물은 우리 시선의 대상으로서 존재하기보다는 오히려 우리를 응시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불편한 시선은 편집증 환자와 같은 광인의 시선이다.

그런데 광인의 시선에 의해서 보여진 이러한 현실공간은 그저 비현실적인 망상의 공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일상적인 시선은 관습에 의해서 정해진 대로 일정한 방향과 거리, 그리고 위치에 의해서 공간을 정위한다.

외젠 앗제, 파리 시내
하지만 원래 현실자체는 어떤 정해진 위치나 방향이 정해져있지 않다. 그것은 관습에 의해서 우리가 만들어낸 창조물일 뿐이다. 에른스트의 그림에 나타난 편집증의 세계는 병적인 망상의 세계가 아닌 일상적인 방향성이나 거리가 제거된 공허한 현실의 세계인 셈이다. 이러한 공허한 현실은 우리의 시선을 불편하게 교란한다.

사진이나 축음기와 같은 새로운 미디어의 발명은 우리의 시각이나 청각을 단순히 확장하는 기계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매체들은 오히려 우리의 일상적인 감각을 교란하거나 광인의 감각을 확장하는 것이었다. 축음기만 하더라도 이러한 사실은 분명하게 입증된다. 축음기는 주변의 소리들을 정확하게 저장한다.

사람의 말소리부터 헛기침 소리, 그리고 주변의 웅성대는 소리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저장한다. 얼핏 이러한 축음기의 정직함은 우리의 일상적인 청각을 보완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축음기의 정직함은 그것이 인간의 귀와는 얼마나 다른지를 증명할 뿐이다.

가령 인간의 귀는 자신이 듣고 싶은 소리에 집중을 하지만, 축음기는 모든 소리를 가감없이 저장한다. 인간의 음성이든 새의 소리든 헛기침 소리든 이 모든 것은 그저 소리일 뿐이다. 인간의 소리와 소음의 구별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인간의 귀는 의미있는 소리와 무의미한 소리를 구분하지만 축음기의 기준에서 보자면 이러한 구분 자체가 무의미하다. 모든 소리는 무의미한 소음일 뿐이다.

축음기가 광인의 담론과 연결될 수 있는 이유는 광인의 말이 근본적으로 무의미한 소음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정상인들의 기준에서 보자면 광인의 말은 무의미한 소음이다. 비록 입으로는 일상적인 단어들을 내뱉는다하더라도 단어들이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통사구조가 완전히 깨져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를 축음기가 재생하는 것처럼 반복적으로 뱉어낸다. 축음기와 광인의 언어는 소음을 반복적으로 재생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신분석학에서 주목하는 것은 환자가 내뱉는 무의미한 반복적 단어들이다.

정상인들에게 이 말은 무의미한 소음처럼 들리지만, 정신분석학자에게 이것은 소음이 아닌 환자의 증상을 나타내는 징후인 것이다. 심지어 정신분석학자는 정상적인 대화에서도 말실수나 농담, 헛소리와 같은 무의미한 소리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한다. 달리 말하면 정상인의 말은 분석의 대상이 아니다. 축음기가 모든 소리를 소음으로 저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미디어로서의 사진 역시 마찬가지이다. 파리 시내를 배회하며 뒷골목이나 담벼락 혹은 건물들을 찍었던 외젠 앗제(Eugene Atget)의 사진들에 대한 벤야민의 통찰이 주는 교훈을 떠올려보자. 앗제의 사진들은 파리의 어느 공간 일부를 담고 있다. 렌즈에 비친 현실공간은 꾸며지거나 가공된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런데 앗제의 사진을 보는 순간 사람들은 왠지 모를 공허감을 느끼게 된다. 현실 공간의 세밀한 부분까지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지만, 그러한 충만한 공간속에서 오히려 왠지 모를 공허감이라니. 이러한 공허감의 정체는 역설적이게도 회화와 달리 사진이 현실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충만함 때문이다.

화가의 눈과 달리 카메라의 렌즈는 의미있는 사물과 무의미한 사물을 구분하지 않는다. 축음기처럼 사진은 무의미한 현실의 일부분들까지 다 담아낸다. 그러니 현실의 공간 자체가 하나의 의미를 담고 있는 공간이 아닌 근본적으로 공허한 공간처럼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사진의 역설이 발생한다. 현실의 세세한 부분까지 매우 충실하게 담고 있는 앗제의 사진이 편집증적인 광인의 시선에서 본 에른스트의 그림처럼 공허한 공간을 표현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사진은 근본적으로 초현실주의적이라는 벤야민의 통찰이 와닿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사진은 시각의 무의식을 표현하며, 무의식은 정상인이 아닌 광인의 말이나 시선인 것이다.

미디어의 가능성은 인간의 감각을 단순히 확장한다는 맥루언의 예상을 넘어선다. 그것은 정상인의 감각이 아닌 광인의 감각을 재생산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광인의 감각을 광기 일반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틀에 박힌 정상인의 세계와 완전히 다른 새로운 세계를 제시한다는 생산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박영욱 연세대학교 미디어아트연구소 HK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