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 총서 시리즈 발간… 천재의 예술세계 이해할 나침반 역할

'TV 샹들리에 No.1', 1989
현대음악 작곡가, 비디오아트 창시자, 네오-아방가르드의 축이었던 플럭서스의 주역, 상업 네트워크 방송망을 이용한 최초의 네트워크 아트 시도, 전 세계적인 화제를 모았던 <굿모닝 미스터 오웰>로 선보인 최초의 위성아트.

이 다양하고도 생소한 수식을 가능케 했던 이는 백남준이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일본에서 독일로, 독일에서 미국으로, 공간뿐 아니라 사유의 유목 역시 멈추지 않았던 그는 그때껏 세상에 없던 예술을 내놓았다.

인간과 자연, 기술과 타자를 통합한 예술은 21세기 예술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관문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백남준의 예술세계는 감히 뛰어들 엄두가 나지 않을 망망대해였다.

최근 발간된 두 권의 책은 그 거대한 바다 위에서 나침반의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이 책들은 백남준아트센터에서 발간한 백남준 총서 시리즈의 첫 두 권으로, <백남준 : 말馬에서 크리스토까지>와 백남준의 예술세계와 그에 대한 분석을 모아 놓은 <백남준의 귀환, NOW JUMP>가 그것이다.

백남준의 <말馬에서 크리스토까지> 책표지
특히 백남준이 직접 쓴 1권은 국내 최초로 소개되는 것으로, 1947년부터 1992년까지 백남준이 작품활동 과정 중에 쓴 에세이와 편지, 악보, 인터뷰 자료 등 60여 편의 글이 묶였다.

이 책들에서 나타나는 백남준의 사상은 '몽골'과 '달'이라는 두 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널을 뛰는 듯한 그의 유목민적 실험들은 몽골 코드로 해독 가능하다. 쇤베르크의 영향으로 음악을 시작한 백남준은 자신의 저서에서 "왜 쇤베르크에게 관심을 가졌는지'에 대해 자문하고 그 답을 '몽골 유전자'에서 찾는다.

"선사시대 우랄 알타이족의 사냥꾼들은 말을 타고 시베리아에서 페루, 한국, 네팔, 라포니까지 세계를 누볐다. 그들은 농업 중심의 중국사회처럼 중앙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들은 멀리 여행을 떠나 새로운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언제나 더 먼 곳을 보기 위해 떠나야만 했다." (1권 190페이지, 백남준)

그 옛날의 몽골 사냥꾼들이 여행을 하며 새로운 사냥감을 포획했던 것처럼, 그 역시 더 먼 곳을 보기 위해 끊임없이 노마드의 길을 걸었다. 그리스어로 '멀리 보다(fernsehen)'는 곧 텔레-비전(tele-vision)과도 일맥상통한다. 몽골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던 그에게 텔레비전을 이용한 비디오 아트가 최고의 오브제가 된 것은 당연해보인다.

그래서 이 같은 그의 전 지구적 예술 실천이 기존 예술사회에서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유럽-백인 사회의 구도를 뒤흔든 것은 역사의 재현이라고 할 만했다. "나는 내 피 속에 흐르는 '시베리안–몽골리안'요소를 좋아한다"는 유머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설파했던 백남준은 1962년에는 '황색 재앙, 그것이 바로 나다(Yellow PERIL! c'est moi)'라고 강력하게 선언한다. 13세기 몽골 제국의 공포를 잊지 않은 유럽에서 그의 '황색'은 곧바로 그 옛날의 '재앙'을 환기시켰다.

백남준아트센터 백남준 총서 시리즈 2권 <백남준의 귀환> 책표지
1965년 독일 아헨공대에서 펼쳐진 '황색 의자들' 퍼포먼스는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커밍아웃'인 동시에 유럽과 백인 사회에 대한 정면도전이었다. 샬럿 무어먼과의 유럽 순회연주 동안 열린 연주회 도중 이루어진 퍼포먼스에서 백남준은 칠판에 '황색 의자들'이라고 쓴 후에 바지를 내려 엉덩이를 노출한 다음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연출했다.

이 일련의 '황색'에 이은 '황색 의자들' 퍼포먼스는 가히 테러라고 할 만하다. 실제로 해프닝의 창시자이기도 한 미국의 현대예술가 앨런 카프로는 " 백남준은 아시아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이 같은 파격적인 퍼포먼스에는 "예술은 보편성이 아니다. 텃세다"라는 지적을 통해 유럽 백인 중심의 현대문명, 그리고 그리스적 사유와 히브리적 사유가 팽배한 문예의 세계를 탈영토화하려는 의도가 있다. 나아가 그때까지 은폐되어 있던 낯선 문화의 '제국'을 출현시키려는 목적도 있다. 물론 '제국'은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이었던 몽골세계제국을 의미한다.

한편 '황색 재앙' 선언과 '황색 의자들' 퍼포먼스 사이에는 백남준 사상의 두 번째 코드 '달'이 담겨진 행사가 있다. 1963년 독일 부퍼탈의 파르나스 갤러리에서 열린 백남준의 첫 번째 전시 <음악의 전시 - 전자 텔레비전>이 그것이다.

물론 그동안 백남준의 '달' 개념을 지적한 시도는 있었다. 그 자신이 '달은 최초의 TV'라고 말하기도 했고, 달과 관련된 작품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드라마가 없고, 선명하지 않으며, 빛의 명멸이 있는 달빛의 특성으로 비디오아트의 빛을 조율한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징키스칸의 복권', 1993
하지만 이번 책 발간 과정에서 백남준아트센트 측이 접근한 경로는 전혀 달랐다. 그 전시가 있었던 파르나스 갤러리 입구에 내걸린 '소머리'를 주목한 것. 이는 2008년 백남준아트센터 개관 페스티벌 '스테이션1'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미 제기된 사항이기도 했다.

소머리와 달, 그리고 인공위성으로 스트레이트 컷으로 연결되는 이 전시는 곧바로 스탠리 큐브릭의 <2001:스페이스 오디세이>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놀라운 것은 백남준이 일본 건축가 이소자키 아라타와의 인터뷰(1984년 «미술수첩»특집호)에서 이미 이 영화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

이 같은 해석은 지난해 5월 소머리의 두 뿔이 가진 신화적 이미지에 착안하면서부터 좀 더 구체적으로 검토되었다. 백남준은 '진공관'의 빈 공간을 하나의 '모태'로 생각했으며, 그 '브라운관'의 내부 공간을 새로운 생명-기계의 잉태처로 삼았다. 신화와 테크놀로지 사이의 대칭적인 연결, 이것이 '달 코드'에서도 핵심개념이었다.

'달' 하면 떠오르는 보름달 대신 초승달을 다루는 것은 유목민인 한국인의 기질과도 관계가 있다. 백남준 역시 완성되지 않은 것, 가려져 있는 것, 시간이 갈수록 차오르는 미래지향적인 모습 때문에 초승달의 형상을 좋아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래서 달은 백남준의 예술적 특이성을 함축하고 있는 하늘의 오브제라고 할 수 있다. 지상의 생명체와 모든 사물을 달빛의 네트워크로 연결하고, 온 세상을 하나로 비추기 때문.

포스트모더니즘의 출현 이후 수십 년째 언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백남준의 예술세계는 그 의미가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백남준아트센터가 개관 후 2년간 연구 끝에 발행한 이번 총서는 아직 읽어내지 못한 백남준을 이해하는 참고서라고 할 만하다. 또 총서 발행과 함께 '백남준의 귀환'를 콘셉트로 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전시는 책에서 지적하고 있는 백남준의 몽골 코드를 파악하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