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향 2010> '재미있는 창극' 모토 전통과 현대 어우러진 실험과 변화

여자와 남자, 두 사람의 사랑, 가족의 반대, 삼각관계, 신분의 차이, 역경과 고난…. 일일연속극이나 미니시리즈에 나올 법한 이 통속적인 설정들은 사실 <춘향전>에 대한 설명이다.

오늘날 만인이 다 아는 뻔한 스토리와 전개에도 불구하고 춘향 텍스트가 춤, 음악, 드라마에서 마르고 닳도록 반복되고 있는 이유는 뭘까.

이 질문은 셰익스피어의 작품들, 가령 <로미오와 줄리엣>에도 똑같이 적용 가능하다.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성이 작품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가 현대적으로 느껴지는데 반해 춘향 텍스트가 여전히 고루하고 진부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뭘까.

전자가 뮤지컬 <웨스트사이드스토리> 같은 변신과 일탈을 빈번히 시도한 반면 원전 춘향의 비틀기는 거의 이루어진 적이 없다. 늘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어하는 관객이 '춘향'이라는 두 글자에서 반사적으로 지루함을 느껴온 이유다.

그런 점에서 최근 몇 년 동안 관객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는 국립창극단의 행보는 고무적이다. 특히 2005년 '젊은 창극' 시리즈로 시작돼 동시대의 감각에 맞는 새로운 창극 레퍼토리로 기획된 <로미오와 줄리엣>은 서양 고전도 소화할 수 있는 창극의 현대적 가능성을 보여줬다.

창극의 가능성이라는 것은 한 마디로 '재미있다'는 것이다. 국악 대중화라는 말로 우리 음악 부흥의 선두에 서 있는 퓨전국악도 어느 정도 한계에 부딪힌 지금, 극의 형태로 보여지는 판소리에 관객이 흥미를 갖기 시작한 것은 괄목할 만한 성과다. 특히 국립창극단이 현대 관객과의 접점을 넓히기 위한 작품으로 <춘향 2010>을 내세운 것은 '재미있는 창극'으로서의 춘향 텍스트의 가능성을 말해준다.

다른 단체와는 달리 국립창극단이 보여주는 춘향은 창극단의 역사와도 무관하지 않다. 1962년 창단작에서부터 1998년 최초의 완판창극 공연, 2002년의 창단 40주년 기념공연도 모조리 '춘향'이 차지했다. 이 사실은 어느 단체보다도 오랫동안 춘향의 모습을 시대 흐름에 걸맞게 고민해왔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21세기형으로 업그레이드했다는 이번 <춘향 2010>의 제목에는 국립창극단의 그런 자신감이 담겨져 있다. 예술감독 취임 이후 창극의 대중화를 목표로 젊은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해석을 가미해온 유영대 예술감독은 이번 <춘향 2010>에서도 캐릭터의 변화에 힘을 실었다.

특히 그는 고전 속의 관념적인 인물을 보다 현대적이고 생동감 있는 캐릭터로 보여주는 데 비중을 뒀다. "춘향은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이몽룡과 변학도는 성취욕이 강하고 다혈질적인 남성으로 그려진다. 현대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인간상들을 통해 보편적 음악극을 지향하는 우리 시대의 창극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늘어지는 템포가 단점이었던 기존의 음악 부분은 현대적인 무대 구성과 어우러지며 오페라나 뮤지컬적으로 흥미롭게 재해석됐다. 춘향과 몽룡 두 연인이 부르는 '사랑의 이중창'에 이어지는 합창, 춘향이 옥중에서 부르는 '쑥대머리' 등의 아리아는 언뜻 오페라를 연상시킨다.

또 어사가 된 몽룡이 거지 분장을 하고 농민을 만나는 장면을 그린 '농부가'와 춘향의 집에 가기 위해 박석고개를 넘으며 부르는 '박석티' 등 익숙한 곡들은 창극 특유의 매력을 성공적으로 배가시킨 부분이라고 할 만하다.

이번 공연에서 소리꾼의 노래에 대한 반주만이 아니라 무대에서 구현되는 모든 소리를 관현악화한 이용탁 음악감독은 화성을 이용한 국악기 중심의 오케스트라로 부드럽고 풍부한 음악적 효과를 만들어냈다. "오케스트레이션의 변용이 이루어졌지만 '춘향'의 음악적 근간은 분명 전통에 있고, 그렇기 때문에 관객들은 <춘향 2010>을 통해 우리 전통음악이 가지고 있는 저력과 감흥을 충분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신 창극'의 냄새는 무대에서도 맡을 수 있다. 임일진 전 국립오페라단 상임미술감독이 맡은 무대는 황적록 세 가지 색으로 구성돼 전통적 색채를 잃지 않으면서도 현대극의 깊은 공간감을 구현하고 있다. 간주가 흐르는 동안에는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와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의 영상이 펼쳐지며 현대 관객의 눈을 즐겁게 한다.

21세기적 변화가 가장 돋보인 부분은 오페라 연출가 출신의 김홍승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시도하고 있는 실험들이다. 김홍승 연출은 이몽룡이 농부들과 어울리는 장면에선 농악패의 풍물놀이와 함께 비보이 춤을 삽입해 기존 창극어법을 완전히 전복시켰다. 춘향이 '쑥대머리'를 부르는 장면에선 하얀 가면을 쓴 귀신들을 등장시켜 기괴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는 "보통 음악극은 재미만 강조하다 하려는 이야기나 사상을 가벼이 하거나, 의미만 강조하다 진부하고 지루한 공연으로 관객의 흥미를 잃게 하기 십상"이라고 설명하며 "5시간이 넘는 판소리 <춘향전>의 반 이상을 덜어내며 극의 균형을 흐트러트리지 않도록 하는 데 치중했다"고 연출의 변을 밝힌다.

하지만 유의미한 실험과 변화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에게 적극적으로 어필하기 위한 '재미있는 창극'이 되기 위해서는 보완할 점이 남아있다. 후반으로 갈수록 긴장감이 고조되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초반부의 전개는 여전히 느슨하게 느껴진다. 화려하고 풍성한 국악기 관현악은 그 자체로는 듣기 좋지만 배우들의 소리를 종종 삼켜버리고 만다. 창극의 새로운 변화를 이끌고 있는 국립창극단이 더 많은 대중 관객과 만나기 위해 고민해봐야 할 과제다.

올해 시험대는 예상보다 빨리 찾아오고 있다. 이번 달 29일 국립극장 60주년 특별공연으로 기획된 <청>이 그것이다. 춘향과 함께 고전 텍스트의 양대산맥이라고 할 수 있는 심청이 창극의 밀린 숙제를 조금이나마 풀어낼 수 있을까. 또 하나의 '재미있는 창극'을 기다리고 있는 관객들의 염원이기도 하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