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상기 화백의 '영원한 퇴원', '공작도시 - 따스한 빛' 드라마에 등장

'공작도시-따스한 빛'
은조(문근영)가 기훈(천정명)에게 처음으로 호감을 표현하던 날, 기훈은 낡은 전축 위에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의 데뷔앨범을 올려놓았다.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선율 뒤로, 기훈이 가지런히 놓아둔 손때 묻은 물건들. 그 사이로 책 제목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시들지 않는 꽃'.

자신의 그림에 이같이 역설적인 제목을 붙여 넣었던 작가는 손상기 화백(1949~1988)이다. '태어난 것이 억울해 죽을 수 없다던' 그는, 그러나 끝내 병환으로 요절했다.

기훈의 소식이 8년 만에 은조에게 당도했던 순간, 손상기 화백의 그림은 다시 브라운관을 채웠다. '시커먼 미술이 빛을 발한다. 하지만 곯아죽을 그림(안 팔리는 미술이라는 의미)'(전혁림 화백의 평)을 그렸던, 이 비주류 작가의 인기 드라마 속 등장은 뜻밖이었다.

부모에게 외면 당해 외톨이일 수밖에 없던, 그래서 사랑이 사치일 수밖에 없던 은조와 기훈. 저주받은 몸과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 평생을 예술에 매달려야만 했던 손상기 화백에게서, 그들이 느꼈던 건 아마 동질감이었을 거다.

'영원한 퇴원'
손상기 화백은 초등학교 3학년 때, 나무에서 떨어져 척추 장애를 갖게 됐다. 때문에 '한국의 로트렉'이란 별명을 얻은 그가 싸워야 했던 건, 왜곡된 신체에 대한 세상의 시선만은 아니었다.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로트렉과 달리, 지독한 가난이 평생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던 그다.

첫 개인전의 그림을 '구걸하면서 굶으면서, 전신을 휘감는 고통 속에서 그렸다'던 그는 아현동 굴레방다리에서 작은 화실을 꾸려가며 근근이 예술가의 생을 끌어갔다. '자라지 않는 나무', '시들지 않는 꽃', '취녀', '공작도시' 등이 대표작으로 남아있다.

화가였음에도, 물감과 캔버스는 그에겐 사치이자 고통이었다. 늘 실패로 인한 낙향과 재료의 소진을 두려워했던 그는 그림 못지않게 엄청난 양의 글을 남겼다. "자신의 예술을 철저하게 '기획'하고 '통제'하려 했다"(양정무 한예종 교수)고도 해석되는 사유의 흔적은 예술적 허기를 달래는 가장 경제적인 방법이었다.

"나는 글을 쓰고 난 후 그림을 그린다. 느낀 감정과 추상을 정직하고 설득력 있게 기록하여 이미지의 집약을 꾀한다. 나의 이 집약은 회화와 문학의 접근을 의미한다."(손상기) 세상을 예리하게 통찰하는 글은 때론 시처럼, 때론 에세이처럼 적혔다.

드라마 속엔 두 작품이 등장했다. 손상기 화백의 작품 중에서 비교적 밝고 단순해 보인다. 병상 위에 지팡이 하나 얹혀진 에선 운명 앞에서 담담한 작가가 보인다. "죽음! 다가오는 죽음보다 확실한 것은 없다. 우리가 죽음을 잊으려 해도 죽음은 잠시도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손상기) 자신의 내면을 담아냈던 . 유난히 햇살이 환하게 반사된 하얀 벽 아래, 그림자처럼 웅크린 꼬마들의 모습이 어쩐지 비참하게 보이지만은 않는다. 현실처럼 쪼들리지 않았던 손 화백 마음의 투영이 아닐까.

"시정 어린 그림과 탁월한 시감과 초인적인 정신으로 세 번 놀라게 하는'(이석우 겸재 미술관 관장) 손상기의 작품을 볼 수 있는 전시가 청담동의 샘터화랑에서 열리고 있다. 5월 30일까지.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