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미술프로젝트 <경기도의 힘>다양한 미술지층 만들어 온 작가들과 그 활동 양상 등 소개

정정엽, '이상하외다', 2010
경기도는 이를테면 서울의 자장(磁場) 같은 곳이다. 고유하고 단일한 특성이 지속되기에는 수도의 지각변동에 따른 유동과 부침이 심했다.

조선시대 경기의 별칭이 사대문으로부터 사방 5백리 이내를 뜻하는 기전(畿甸)이었다는 사실은 이 지역의 주변적 특성을 잘 말해준다.

하지만 태풍의 영향이 눈 주변에서 가장 크듯 서울의 해자(垓子)이자 수원(水源), 주변 지역으로서의 역동성은 오늘날 경기도의 힘이 되었다. 교통의 역사는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고 실용적이고 진취적인 문화가 꽃 피는 바탕이 되었다.

경기도미술관이 마련하는 2010년 경기미술프로젝트 <경기도의 힘>은 이러한 경기도의 문화적 지형을 새롭게 지도 그리려는 시도다. 경기미술프로젝트는 경기도의 자산으로서의 문화와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취지로 2007년부터 매년 열리는 기획전.

2007년에는 국도를 따라 펼쳐지는 분단과 신도시, 산업화의 풍경을 훑는 <경기, 1번 국도>, 2008년에는 근대의 나혜석과 현대의 윤석남을 축으로 여성주의 미술 담론을 살피는 <언니가 돌아왔다>를 진행했다. 작년 <세라믹스-클라이맥스>에서는 경기도의 또 하나의 문화 유산인 도자기를 현대미술의 재료이자 미디어로 재조명했다.

다빌킴, '일곱 개의 작업물', 2009
올해 <경기도의 힘>은 이전 전시와는 달리, 경기도 미술의 결과가 아닌 과정을 담아 냈다. 다기한 미술 지형을 만들어 온 작가들과 그들의 활동 양상을 개괄했다. 경기도 미술의 전통인 원로 작가부터 대안공간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신진 작가에 이르는 작가 중심의 역사, 1980년대 이후 활성화된 주요 예술 소집단 활동 정리, 현재와 현장에 밀착해 우려낸 대안공간 프로젝트들의 재구성 등 여러 축을 아울러 엮는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김종길 학예연구사는 "지역과 지역을 가로지르고 작가와 작가를 네트워크해 재구성하는 '아트 맵'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기도 미술, 사방치기로 접근하기

경기도 문화의 스펙트럼을 세분화하면 흥미로운 역사, 사회적 이슈들이 도출된다. 고구려의 옛 영토이자 휴전선과 접해 있는 경기 북부에는 유적지와 군부대가 많다.

예전에는 미군 주둔으로 발전한 의정부와 동두천 등이 경기 북부 문화의 중심지였다면 최근에는 신도시로 개발된 파주와 고양으로 그 역할이 옮겨갔다. 예술마을로 기획된 파주 헤이리와 작가들이 스스로 모여살기 시작한 고양 일산 구산동은 특히 주목 받는 곳.

임승천, '바이러스', 2008
경기 동부는 평안한 지대여서 작가들의 작업실이 많은 곳이다. 자연 경관이 뛰어나다는 이점이 있다. 양평이 가장 각광받는 예술의 중심지이며 여주, 이천, 광주는 도자기 문화가 발달했다.

경기 남부는 국도를 따라 형성된 상업도시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정조의 수원 화성이 있는 수원은 그 역사적 연원이 깊어 문화가 자리잡을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1980년대 이후 소집단 운동이 활발히 일어나기도 했다.

경기 서부는 다문화의 성향이 가장 짙다. 인천이라는 항구 도시를 통해 유입된 이주 노동자들이 시흥, 안산, 화성 등 산업 도시로까지 퍼져 나갔기 때문이다. 이런 지형은 현실과 단단히 결부된 예술 행동들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이었다. 현재도 지역 문화 운동이 가장 활달히 전개되는 곳이기도 하다.

김종길 학예연구사는 이렇게 다양한 문화적 바탕이 상호교류하는 과정과 더불어 경기도 미술의 상상력이 태어났다고 지적한다. "지역 간의 이합집산과 인구 이동, 도시화와 신도시화, 산업화, DMZ, 시화호, 미군기지 이전 등 여러 이슈들이 제기되었고 그 이면의 향토성 상실, 농촌문화 붕괴, 노동 문제, 분단과 생태, 강제이주 등이 주요 소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경기도 미술에서 정치, 사회적 이슈들이 가장 첨예한 형태로 나타나는 이유다. 시화호와 대추리를 중심으로 한 움직임이 대표적인 예다. 197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인천과 수원을 중심으로 리얼리즘 미술의 조류가 형성되었던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구본창, '탈(강릉 관노가면극), 2002
불협과 경계를 품고 나아가는 경기도 미술의 현재

<경기도의 힘>에 전시된 경기도 미술의 현재는 이 모든 역사, 지리적 과정을 반영한다. 내부에 불협과 경계를 품고 있어 보는 이를 각성시킨다. 공공성이라는 현대미술의 화두를 지역적으로 풀어낸 작품들이다.

예를 들면 임승천의 <바이러스>는 발전과 풍요에 대한 한국사회의 끊임없는 욕망이 투사된 대상인 아파트를 모티프로 한 작품이다. 이 못생긴 오브제를 공중에 둥둥 띄워 놓음으로써 한국사회의 부유하는 상태를 표현한다.

정재철의 <뉴실크로드 프로젝트>는 작가가 2004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로, 산업폐기물인 현수막을 세척해 실크로드 지역 주민들에게 전달해 사용하게 한 후 그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현수막들은 전혀 다른 맥락에서 재활용되며, 나름의 실용성을 찾아간다. 현수막에 적힌 '개인회생', '파산' 등의 남루한 단어처럼 우리가 목을 메고 살아가는 한국사회의 치열하고 척박한 현실도 문득 덧없게 느껴진다.

정정엽의 <이상하외다>는 나혜석의 실제 얼굴과 그녀의 자화상을 반반씩 합쳐 만든 초상이다. 여성작가들이 겪어온 분열증, 타인의 시선과 자아 정체성 간 간극 사이에서의 고뇌와 갈등은 경기도는 물론 경기도에 집약된 한국 근대화의 역사를 대변하는 듯하다.

그리하여 우리가 나아갈 길은 어디인가. 구본창 작가의 <탈(강릉 관노가면극)>은 매우 간결하고도 정직하게 관객을 응시한다. 한국의 문화예술이 처한 자리, 그 가능성과 한계가 어쩌면 저기일 것이다. 전통을 현대에 살려내면서 그 경계를 탐색하는 것. 경기도 미술의 지형의 연장선에서 그 한 장의 사진은 세계사 속에서 한 약소 지역이었던 한국사회에 핵심적인, 현재진행형의 질문들을 던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경기도 대안 미술의 지형들
경기도의 대안공간은 현대 한국미술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실험실이다. 안양의 <보충대리공간 스톤앤워터>가 진행 중인 '석수시장프로젝트-국제레지던시프로그램'은 재래시장 곳곳에 작가를 투입시켜 생활과 예술을 접목시킨 프로젝트로 최근 활발한 문화예술을 통한 도시 재생 사업의 초창기 성공 사례로 기록될 만하다. 현재는 석수시장을 허브로 다른 지역들을 연결하는 다양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안성의 <대안공간 소나무>와 수원의 <대안공간 눈>은 문화예술 인프라가 척박한 지역의 작가 중심 네트워크의 장이 되고 있으며 부천의 <대안공간 아트포럼 리>는 작가를 발굴하고 교육프로그램을 마련하는 등 지역 미술을 활성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안산의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는 다양한 국적의 이주 노동자들이 거주하고 있어 국경 없는 마을로 알려진 원곡동에서 다문화라는 테마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의정부의 <문화살롱 공>은 경기 북부 빈 집에서 샤머니즘적 주술 행위를 하거나 수몰 예정 지역인 재인폭포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퍼포먼스를 하는 등 지역에 기반한 전위적 예술을 선보이고 있다.

정재철, '뉴실크로드 프로젝트', 2010
경기도의 미술관
경기도의 미술 문화는 미술관 현황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국공립 미술관과 박물관이 34개에 달하고, 그 중 미술관은 과천의 국립현대미술관, 안산의 경기도미술관, 용인의 백남준아트센터, 이천의 시립월전미술관과 세계생활도자관 등 다섯 군데다. 경기도는 최근 건립 중인 미술관 2곳과 박물관 4곳에 약 63억 원을 지원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중 양평군립미술관은 내년 상반기, 양주의 천경자미술관은 내년 중 완공될 예정이며 근대 건축가 김중업을 기리는 안양의 김중업박물관은 올해 말 완공된 후 내년 상반기에 문을 연다. 이외에 부천 옹기박물관, 과천 추사박물관, 남양주 유기농박물관 등이 내년 여름께까지 완공된다.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