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 아트와…>, <코믹북스 열전> 등 높아진 위상 실감

어두컴컴한 극장 안. 화면 안에선 알록달록한 합금 갑옷을 입은 주인공이 공중을 날아다니며 적들을 퇴치한다.

현란한 CG와 만화 같은 전개에 환호하는 이들은 비단 아이들뿐만이 아니다. 오히려 극장을 채운 관객들의 연령대는 상당히 높아 보인다. 최근 티켓예매 사이트를 대거 점령한 영화 <아이언맨2>의 상영 현장이다.

<아이언맨2> 이전에 등장했던 <인크레더블 헐크>나 <다크 나이트> 등 최근의 슈퍼히어로 영화의 흥행도 30대 이상의 성인 관객의 열광에 힘입은 바 크다. 어린 시절 즐겨보았던 만화를 영화로 더 생동감 있게 다시 만나는 즐거움이 성인 관객들이 슈퍼히어로 영화에 몰리는 이유다.

또 이들 만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을 피규어(figure)로 제작해 소장하는 취미는 이제 키덜트족만의 전유물이 아닐 정도로 보편화되어 있다. 아무 무늬가 없는 기본 몸체에 각자의 개성을 담아 변신을 시킴으로써 자신만의 장난감으로 만드는 '커스텀 토이' 또한 국내에 마니아층이 형성되어 있다.

이처럼 만화나 장난감이 어린이들의 영역을 넘어 문화산업적, 예술적 효용성을 인정받으며 그 가치를 재조명하려는 시도가 잇따르고 있다. 특히 문턱 높은 예술공간에서 전시되는 만화와 장난감 기획전은 그 높아진 위상을 실감케 한다.

'드림메이커 아트&토이' 전 중 윤정원
성남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로봇 아트와 놀이의 세계>전은 국내 최초로 일본 로봇 아트의 역사와 전망을 모두 망라하고 있는 전시다. 이 전시에는 대중에 잘 알려진 로봇인 아톰, 철인 28호, 건담 등 인기 캐릭터들도 있지만, 그보다는 '차 나르는 인형', '활 쏘는 동자' 등 일본 에도시대의 '가라쿠리' 인형 재현품 전시에 방점이 찍혀 있다.

가라쿠리란 실과 태엽 등을 이용하여 만든 모형이나 인형을 뜻하는 말로, 일본에서는 17세기 경부터 톱니바퀴 기술을 응용해 움직이는 가라쿠리 인형이 큰 사랑을 받아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30년간 가라쿠리 인형을 제작해온 대표적인 가라쿠리 장인이 초청돼 가라쿠리 인형의 보존과 복원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시간도 마련됐다.

성남아트센터 측은 "어린이들에게는 과학에 대한 관심을 한층 더 높여주고, 어른들에게는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 다양한 로봇들의 매력을 즐길 수 있는 전시가 될 것"이라며 기획 의도를 밝히고 있다.

코리아나 미술관의 오픈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코믹북스열전>은 성인 만화광이 여는 '개인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다양한 수집가의 세계를 조망해온 코리아나 미술관의 '수집 아트' 전시가 이번에는 1만여 권에 달하는 만화 관련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김상하 씨의 수집품을 택한 것.

고등학생 시절부터 만화를 수집하기 시작한 김 씨는 현재 만화책 8000여 권, 잡지 1000여 권, CD 등 기타 자료 20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는 만화책 수집가. 이번 전시에선 그가 고등학교 때 처음 구입한 일본 애니메이션 잡지 <뉴타입>에서부터 절판된 희귀 단행본 <감벽의 나라>(미즈하라 켄지), <츠나믹스>(우미노 츠나미), <창세기>(호시조노 스미레) 등 11년 동안의 수집 과정이 공개되고 있다.

'로봇 아트와 놀이의 세계' 전
"일본의 하위문화를 통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이 현실화되는 재미를 맛본다"고 말하는 김 씨는 "이번에 공개되는 수집품만으로도 21세기 전후의 일본 하위문화의 한 면을 보여줄 수 있어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한편 이달 초부터 롯데백화점 명품관 에비뉴엘에서 시작된 <드림메이커 아트&토이(art&toy)>전은 예술로 재탄생한 장난감들을 발견하는 행사다. 기성품 장난감과 함께 18명의 아티스트, 디자이너, 수집가들이 재해석한 총 1천여 점의 장난감들이 에비뉴엘의 지하 2층부터 9층 롯데갤러리까지 백화점 곳곳에 전시된다.

자본주의 사회를 상징하는 백화점이라는 공간, 그중에서도 명품관에 배치된 이 장난감들은 진열된 다른 명품들처럼 값비싸게 팔려나가기 위한 '상품'이 아니다. '장난'이라는 말의 어감처럼 예술가들의 장난감에 대한 재기발랄한 시각적 해석을 엿볼 수 있다.

'아트 토이'로서의 성격은 현실세계를 투영한 작가들의 개성에서 뚜렷이 엿보인다. 진현아 작가는 장난감의 특정한 패턴으로 오늘날의 문화적 현상들을 보고하고, 귀여운 곰돌이 인형에 희미하게 해골 모양을 중첩시킨 박기훈 작가의 작업은 현대인의 초상을 위트 있게 보여준다.

분홍으로 가득 채워진 방안에 있는 여자 아이를 보여주고 있는 윤정미 작가의 사진 작품은 어린이 성별 기호가 분홍과 파랑으로 고정된 젠더 사회학의 현재를 날카롭고 흥미롭게 보여준다. 사실은 싸구려 장난감들인 윤정원 작가의 분홍 집합체가 쇼핑을 하러 온 고객들에게 "이것 좀 봐봐, 작품이야 작품"이라는 호평을 얻어낼 때, 저렴한 원가의 장난감들은 명품관이라는 고급스러운 공간에서 새로운 가치를 부여받는다.

'드림메이커 아트&토이' 전 중 박기훈 작가의 해적 곰돌이-애꾸눈 잭
<드림메이커 아트&토이(art&toy)>전을 기획한 성윤진 큐레이터는 "이번에 전시되고 있는 작품들은 예술적 성격의 장난감과 장난감의 특성을 이용한 예술품으로 구분할 수 있지만 '예술'이라는 공통분모로 한 자리에 모은 데 의미가 있다"고 설명한다. 그는 장난감 작품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거나 반영한 작가들도 자신들의 작품이 자본주의의 총아인 백화점이라는 공간에서 전시된다는 소식에 오히려 '제일 적절한 장소'라며 흥미로워했다는 후문도 들려준다.

만화와 장난감은 더 이상 일부 철없는 어른들의 취미생활만은 아니다. 예술 같지 않으면서도 현대사회의 속성을 절묘하게 반영하는 현대예술이 그렇듯, 만화와 장난감은 대중과 가장 밀접한 지점에서 가장 흥미로운 방식으로 현재를 읽어내는 도구가 되고 있다.


'코믹북스 열전'의 김상하 씨
'코믹북스 열전' 중 감벽의 나라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