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은 가장 오래된 시계다> 전강, 물, 달, 끈 네 부분으로 나눠 시간에 대한 다양한 인식 보여줘

김호득, 흔들림, 문득 - 공간을 느끼다, 2010
하루가 다르게 경관이 변하고 거리의 흐름이 그 어느 곳보다도 빠른 서울 광화문. 행인들과 자동차들이 촌각을 다투며 지나가는 와중에 유독 시간이 고여 있는 장소가 있다.

바로 덕수궁이다. 태풍의 눈처럼 고요한 이 곳의 역사와 자연은 현대의 달음박질에는 아랑곳 없이 늘 제 모습이다. 이 오래된 정원 안에서 시간이 무엇인지 돌아보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지난 8일부터 시작한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미술관의 <달은 가장 오래된 시계다> 전이다. 백남준의 작품 <달은 가장 오래된 텔레비전이다>에서 제목을 따 왔다. 문명의 이기가 이토록 일상을 점령하지 않았을 언젠가 달은 가장 매혹적인 볼 거리이자, 시공간적 좌표를 알려주는 지침이었을 것이다.

달이 차고 이울고 다시 차오르는 풍경은 우리 역시 저 크고 어김 없는 순환의 고리에 포함되어 있음을 말없이 일러주었을 것이고, 한 인간의 안달복달 따위야 그 안의 한 점에 불과하다고 깨우치고 달래주었을 것이다. 현대의 시간을 등지고 돌아보는 일은 그 오래된 의례를 기억하는 일이다.

이런 뜻을 담은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강', '물', '달', '끈'이라는 네 개의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시간의 메타포다. 강처럼 흐르고, 물처럼 흔들리고 번지며, 달처럼 차고 이울고 차며, 끈처럼 이어지는 시간의 속성을 뜻한다.

존배, 스토리 텔러의 딜레마, 2010
'강'에는 김호득 작가의 <흔들림, 문득-공간을 느끼다>가 자리하고 있다. 전시장 입구로부터 저 끝까지 먹물 강이 뻗어 있고 그 위에 한지들이 주르륵 매달려 있다. 바람이 없어도 소리가 없어도 물과 얇은 종이는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다. 시간을 느끼는 예민한 존재들이다. 우리도 숨을 죽여 그 감각을 공유하게 만든다.

'물'에는 한은선 작가의 <물결치다>가 펼쳐져 있다. 이접지에 물을 들여 떼어내고 또 떼어낸 결과다. 세공(細工)이다. 그 과정에 담긴 길고 촘촘한 시간이 짙게 배어 있는 작품이다. 돌아나오는 길에는 이진준 작가의 <불면증>이 상영 중이다.

창에 드리운 블라인드가 들썩이고 그 틈새로 빛이 들어오는 광경을 찍은 비디오 작품이다. 불면증 환자가 가장 신경이 곤두서 있다는 정오 갓 넘은 시각이다. 대상의 움직임과 명암이 민감하게 포착되어 있다. 지켜 보고 있으면 이렇게 또 하루가 오고 간다는 것이 생경하게 느껴진다.

'달'은 이 전시의 심장과도 같다. 전시를 기획한 김남인 큐레이터는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시간의 단위, 시계는 둥근 형태로 상상되었다. 그것은 시간이 모나지 않고 펼쳐지는 것, 끝없이 둥글게 순환하는 것, 그리고 하늘을 닮은 것이라는 사람들의 오랜 관념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강익중 작가의 <365 달 항아리>와 백남준의 <달은 가장 오래된 텔레비전이다>가 여기에 자리 잡고 있다. 두 작품 모두 시간에 대한 옛 인식과 현대의 인식 사이 긴장감을 내포하고 있다.

강익중 작가의 <365 달 항아리>는 서로 다른 길이의 365개 패널에 달 항아리들을 그려 넣은 작품. 작품 곁을 걸어가며 보면 달 항아리들이 깨어졌다 다시 붙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문명의 편의에 따라 365일로 나누어진 시간이 원래는 구획 없는 것임을 주장하듯이. <달은 가장 오래된 텔레비전이다>는 서로 다른 꼴의 12개의 달 영상을 동시에 상영하는 작품이다. 작품 안에서 시간은 처음과 끝, 앞과 뒤 없이 시간들로써 공존한다.

이진준, 불면증, 2006
현대에 들어와 특정한 단위로 나누어지고 직선의 모양이 되어 사람들을 옥죄어 온 시간을 도로 저 자연의 순리와 잇고자 하는 의지가 '끈' 부분 작품들에서 나타난다. 존배 작가는 직선 형태의 재료들을 얽고 또 얽어 큰 덩어리로 만들어 놓았다. 어떤 체계도 없기 때문에 그 세부가 역동적이다. 다양한 이음의 형태들이 하나의 작품 안에 함께 살아 있다. 마치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인간과 세계 간 만남의 다양한 가능성을 상징하는 것처럼.

시간에 대한 다양한 인식은 나아가 삶에 대한 다양한 상상력을 회복시킨다. 백남준의 에서 TV 브라운관을 가로지르는 단 하나의 굵은 선이 사실 무수하고 끊임없이 깜박이는 전파들의 집합임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저 굵은 선, 빠른 속도와 앞을 향한 방향성에 점령 당한 시간에 대한 현대의 상식 혹은 강박관념이 제각각인 전파들, 나와 당신과 우리 자신의 존재를 놓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달은 가장 오래된 시계다> 전은 7월4일까지 열린다.


한은선, 물결치다, 2006
강익중, 365 달항아리, 2008-2010
백남준, TV를 위한 선(禪),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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