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음악·사진 통해 사회적 이슈 예술적 시각으로 재해석

영화 '날아라 펭귄'의 권 과장
최근 뉴질랜드 남섬에서 벌어진 한국인 일가족 자살 사건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세 모녀는 2002년부터 뉴질랜드에서 유학 중이었고, 아버지는 한국에서 그들을 부양해왔다.

전형적인 기러기 가족이다. 생활고를 겪으면서 세 모녀가 자살했고, 이들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뉴질랜드에 도착했던 아버지마저 자동차 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 기러기 가족의 비극이 전해지면서 잠잠해졌던 문제가 다시금 수면 위로 올라왔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등장으로 90년대 말부터 빈번해진 '신 이산가족'이지만, 결국 돈 때문에 가족이 무너지는 경우를 목격하게 된다.

비정상적인 가족, 중산층의 욕망과 불안의 투사라는 지적이 이어졌지만 문제든, 아니든, 이제 기러기 가족은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인 가족의 형태가 되어가고 있다.

'기러기 가족'으로 일반화되고 명백한 '병폐'로 여겨지는 사회적 시각에서 벗어나, 예술가들은 이 같은 사회적 이슈를 어떻게 해석해내고 있을까. 우연찮게도 영화, 음악, 사진 분야의 예술가들은 모두 여성이었다. 일부는 실제로 기러기 가족으로 생활하면서 겪은 주관적인 경험들도 예술이라는 틀 안에서 녹여냈다.

밴쿠버의 장주희 가족, 76x61cm, digital print, 2009
독수리 아빠 vs 펭귄 아빠

해외에 교육을 위해 자식과 아내를 보낸 아빠들 사이에도 등급이 있다.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 언제든지 가족을 만나러 갈 수 있는 이는 독수리 아빠, 1년에 한두 번 간다면 기러기 아빠, 빠듯한 살림으로 꼼짝없이 가족들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이는 펭귄 아빠다. 날개가 있어도 날 수 없는 펭귄 아빠, 권 과장은 슬프다.

임순례 감독의 <날아라 펭귄>에 등장하는 40대의 권 과장은 점심시간에 화장실에서 떨어진 와이셔츠 단추를 꿰매고 싸늘한 집에는 맨정신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침대를 두고 거실에서 TV를 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스르륵 소파에서 잠드는 게 일상이다.

부재한 가족, 소파 뒤에 걸린 가족사진만이 그 공간에 그들이 함께 있었음을 알려줄 뿐이다. 하지만 4년 만에 만난 가족들은 애써 숨겨온 그리움만큼 반갑고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함께 놀 친구가 없다며 괜히 왔다는 아들, 자기 방 물건에 손대지 말라는 딸, 남의 집에 누워있는 것 같다는 아내.

집에 머무는 동안에도 학원과 진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은 아내와 아들, 딸, 셋뿐이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머물지만 권 과장은 외딴 섬이다. 유학 비용이 모자라니, 집을 정리하고 오피스텔로 가라는 아내의 말이 비수처럼 꽂힌다.

밴쿠버의 추은희 가족, 76x61cm, digital print, 2009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케처럼

자칭 '일상의 작곡가'라고 말하는 강은수 작곡가는 마흔둘의 나이에 박사논문을 위해 독일 유학길에 올랐다. 13살과 11살의 아들 딸과 함께였다. 자녀의 조기교육을 위해 기러기 가족을 자처하는 경우와는 다르지만 현지에서 어머니가 정신적 지주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사실은 다르지 않았다.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강은수 씨는 자작시를 지었다.

독일의 비오는 일상을 그려낸 시는 행을 더하면서 한국에 남겨진 가족을 향한 그리움과 생활의 애달픔으로 발전한다. 때마침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케'라는 테마로 곡을 위촉받은 강은수 씨는 이 자작시에 곡을 붙였다. 기러기 가족의 이산의 현실을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케에 빗댄 것이다.

카운터테너와 플루트, 바이올린과 하프를 위한 곡으로 작곡된 작품은 '기러기 날개에 보내는 세 개의 오르페오 노래'로 명명됐다. 남성과 여성을 넘나드는 듯한 묘한 목소리를 가진 카운터 테너는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에우리디케와 오르페우스의 운명을 암시하는 듯하다.

작품을 통해 그리움을 절절히 표현했지만 강은수 작곡가는 기러기 가족이, 가족의 해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주위에 워낙 기러기 가족이 많아서 쉽게 한 결정이었지만 사춘기에 들어선 아이들을 데리고 외국의 교육과 문화 충돌을 혼자서 헤쳐가리란 무척 힘이 들지요." 두 아이가 외국 대학에 진학했지만, 그 때문에 네 명의 가족은 언제 다시 만날지 알 수 없는 이산가족으로 뿔뿔히 흩어져 살아가고 있다.

밴쿠버의 이지은 가족, 76x61cm, digital print, 2009
가족적 합의, 그 이후의 삶

엄마 '혹은' 아빠와 아이들이 한집에서 살고 있다. 1살짜리 아기부터 스무 살의 성인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그들은 완전히 한 공간에 존재하지 못한다. 창, 방, 책상, 소파, 혹은 침대로 그들은 분리되어 있다. 엄마의 시선은 카메라를 바라보고, 아이들은 엄마(혹은 아빠)를 바라보거나 카메라를 본다. 그도 저도 아니면 시선을 외면한다.

기러기 가족의 주체와 객체가 뒤바뀌는 순간이다. 자녀의 교육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기러기 가족을 선택했지만 그 선택의 주체이자, 현재 이 가정의 정신적인 주체는 엄마라고 사진은 말하고 있다. 또한 같은 나라와 시간을 살고 있지만 그들이 경험은 엄격히 다름을 암시한다.

최근 대안공간 건희에서 열린 이명숙 작가의 사진전은 이처럼 기러기 가족에 대한 또 다른 시선을 보여준다. 캐나다에서 사진을 공부한 작가는 기러기 가족이 단지 자본주의에 경도된 사람들의 문제가 아닌, 여성 문제와 교육의 문제일 수 있다고 했다.

"기존의 저널리즘이 바라보는 사회적인 시각과 아트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싶었습니다. 기러기 가족이라고 규정하지만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가족과 다를 바 없는 하나의 가족 형태라고 봅니다. 아버지의 부재가 주는 공허함은 그곳에서 더 두드러지지는 않는다고 봐요.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도 아버지의 부재를 보거든요. 사회에 아버지를 빼앗겨, 아버지가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아이러니 한 상황도 슬프기는 마찬가지죠."

더 이상 기러기 아버지를 옳다, 그르다로 판단할 수는 없다. 또한 이 거대한 흐름을 막는 것도 무리다. 하지만 이것을 문제가 아닌 하나의 현상으로 받아들일 때, 바람직한 방향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런 현상 속에는 이미 아버지의 물적 지원과 어머니의 정신적 지원이라는 '가족적 합의'가 존재한다. 이 합의 이후의 삶, 즉 '왜?'가 아니라 '어떻게?'라는 질문이 새로운 길을 찾아줄 수 있을 거라고 이명숙 작가는 말하고 있다.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