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ssic in Cinema] (12) 영화 <엑스칼리버> 속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아더왕의 전설 속 '마법의 칼' 신비와 위용 표현에 안성맞춤

1981년에 제작된 존 부어맨 감독의 <엑스칼리버>는 아더왕의 전설을 바탕으로 만든 작품이다.

여기서 엑스칼리버는 아더의 왕권을 상징하는 마법의 칼을 말한다. 역사를 살펴보면 아더 왕은 게르만 민족의 침입이 있었던 6세기경에 켈트인의 영웅으로 활약했던 인물로 나온다.

그는 켈트의 여러 민족을 이끌고 게르만을 격파해 켈트의 영국 지배권을 지켰다. 이런 아더 왕의 이야기는 그 후 구전을 통해 수 세기 동안 전해 내려오게 되는데, 그러는 동안 이야기가 보태져서 나중에 아더는 브리튼을 통일한 왕이 된다.

이런 중세의 전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엑스칼리버>는 바그너의 음악으로 문을 연다.

중세 암흑시대, 나라는 분열되고 왕은 없었다.
혼돈의 시대에 한 전설이 있었으니
마법사 멀린, 왕의 출현, 그리고 전능의 칼 엑스칼리버.

이런 자막과 함께 나오는 곡은 바그너의 음악극 <니벨룽의 반지>의 제4부 <신들의 황혼>에 나오는 <지그프리트의 장송곡>이다. 바그너는 전설과 신화, 영웅이야기를 광적으로 좋아해 그것들을 즐겨 자기 음악극의 소재로 삼곤 했는데, 영화 속에 나오는 아더왕이 브리튼족의 전설적인 영웅이라면, 음악극에 나오는 지그프리트는 게르만 족의 전설적인 영웅이라 할 수 있다.

부와 권력의 상징인 라인의 황금을 갈망하던 신들은 그 황금으로 만든 반지에 내린 파멸과 저주 때문에 멸망할 운명에 처하고 만다.

<라인의 황금>에서 세계의 창조를 보고, <발퀴레>에서 인간이 태어나 자라는 것을 실현시킨 신들은 <지그프리트>에서 그들이 바라던 영웅을 등장시켰다. 하지만 신들은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야망을 이루지 못하고 황금이 지닌 마력에 의해 끝내 몰락하고 만다. 음악극의 마지막 편인 <신들의 황혼>에서 주신의 직계인 베르증크 족의 영웅 지그프리트가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이다.

하겐의 창에 맞아 심한 상처를 입은 지그프리트는 조용히 눈을 뜨고 사랑하는 아내 브륀힐데에게 작별을 고한다. 군터는 지그프리트 옆에 무릎을 꿇고 신하들도 그를 따른다. 지그프리트는 두 명의 신하에게 몸을 맡긴 채 브륀힐데에게 작별을 고한 다음 숨을 거둔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영웅의 죽음을 슬퍼하는 가운데 군터는 지그프리트의 시신을 성으로 옮기도록 한다. 바로 이 장면에서 흐르는 음악이 바로 <지그프리트의 장송곡>이다.

이 영화에서 바그너의 곡은 전지전능한 힘을 가진 마법의 칼 엑스칼리버의 위용과 신비를 나타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처음에 '중세 암흑시대'라는 자막과 함께 시작된 음악은 아더의 아버지인 우더왕이 마법사 멀린에게 마법의 칼을 요구하고, 호수 속에서 엑스칼리버를 든 요정의 손이 나와 칼을 건네주는 장면까지 줄곧 이어진다. 도입부의 웅장한 오케스트레이션과 북소리를 연상시키는 금관악기의 독창적인 사용이 압권이다.

바그너의 <지그프리트의 장송곡>은 엑스칼리버의 출현과 퇴장을 알리는 동시에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곡이기도 하다. 이 비장한 음악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 즉 아더가 아들을 죽이고, 퍼시벌이 엑스칼리버를 호수의 요정에게 돌려보내고, 아더의 시신이 배에 실려 멀리 떠나는 장면에도 나온다. 이름 그대로 영웅의 최후에 걸맞는 웅장하고도 비장한 장송곡이다.

사실 아더와 같은 민족의 영웅과 엑스칼리버와 같은 마법의 칼이 등장하는 영화에 바그너의 음악만큼 어울리는 것도 없을 것이다. 바그너의 음악세계 자체가 온갖 비현실적인 공상과 신화, 전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의 음악은 일상적인 현실을 넘어선 그 무엇을 보여준다.

이 과대망상주의자에게 인간사의 희로애락은 한낱 헛된 푸념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그는 늘 음악을 통해 현실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힘을 보여주려고 했다. 구전을 통해 어느덧 브리튼을 통일한 왕이 되어버린 아더. <지그프리트의 장송곡>은 그 거대한 민족영웅신화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또 하나의 음악적 영웅신화가 아닐 수 없다.



글 진회숙 (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