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ssic in Cinema] (13) 영화 <샤인> 속 비발디의 <세상에 참 평화 없어라>세속의 가식 벗고 무한 자유 향한 몸집… 새 삶에 예고하듯 울려 퍼져

스콧 힉스 감독의 <샤인>은 불운의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헬프갓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이다. 주인공 데이비드 헬프갓은 호주로 건너온 폴란드계 유태인 가정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피아노에 소질이 있어 장학금을 받고 영국 왕립음악학교에 들어갔지만 음악회 오디션에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친 후 정신착란을 일으키고 쓰러진다. 자신이 갖고 있던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를 모두 소진하고 그만 세상과 소통하는 줄을 놓아버린 것이다.

그 이후 데이비드의 삶은 외로움의 연속이었다. 한때 뭇 사람의 시선을 받던 일류 피아니스트였으나 이제는 세상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진 채 정신병원에서 쓸쓸하게 남은 삶을 보낸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에게 완전히 잊혀진 존재가 된 상태로 거의 12년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카페에서 피아노를 친 것을 계기로 데이비드는 그 카페의 피아니스트로 일하게 된다. 그리고 같은 곳에서 일하는 실비아라는 여자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다. 실비아로 인해 데이비드는 자신의 삶을 바꾸어놓을 아주 중요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 사람은 바로 실비아의 친구 길리언이다.

길리언이 먼 곳에서 실비아의 집으로 찾아왔을 때, 집 안에는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이 흐르고 있었다. 집안은 온통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여기저기 쓰레기와 옷가지들이 흐트러져 있고, 언제 틀어놓았는지 목욕탕의 샤워기에서는 물이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실비아와 길리언이 데이비드를 찾아 마당으로 나온 순간, 눈앞에 놀라운 광경이 벌어진다. 정원에 설치된 트램펄린 위에서 벌거벗은 몸에 달랑 외투 하나만 걸친 채 허공을 뛰어오르고 있는 데이비드를 발견한 것이다.

세속의 가식을 모두 벗어던지고 공중을 향해 무한한 자유의 몸짓을 하는 데이비드. 길리언과 데이비드가 앞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을 예고하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이 이 장면을 배경으로 비발디의 <세상에 참 평화 없어라>가 울려 퍼진다.

이 세상에 고통 없는 진정한 평화는 없어라.
자비로운 예수, 당신 안에 있는 참되고 순수한 평화
형벌과 고문 속에서도
벌과 같이 순수한 사랑의 빛이 비칠 때에만
영혼이 위안을 얻게 된다네

영화에서 이 노래를 부른 사람은 고음악 전문가수인 소프라노 엠마 커크비이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알겠지만 바로크 시대 성악곡을 부르는 가수들은 목소리에 과도하게 감정을 싣지 않는다. 낭만시대 오페라를 부르는 것처럼 바이브레이션을 사용하거나 드라마틱하고 과장된 창법을 구사하지 않는다. 인간이 갖고 있는 순수한 목소리, 자연스러운 목소리, 천사의 음성처럼 맑고 청아한 목소리를 구사한다.

데이비드가 허공을 오를 때마다 엠마 커크비의 목소리와 같은 순수하고 해맑은 자유와 평화의 기운이 허공을 향해 퍼진다. 이 노래의 가사처럼 이 세상에 대가 없이 저절로 얻어지는 평화는 없다. 저절로 얻어지는 자유도 없다.

데이비드의 삶이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지금 그가 누리고 있는 평화와 자유는 오랜 세월 동안의 외로움과 고통이 가져다준 선물이다. 그 깊은 어두움을 뚫고 다시 세상에 나와 세상 사람들과 이제 막 손을 잡기 시작한 데이비드.

그가 허공을 향해 뛰고 있다. 다른 사람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이 순간 데이비드는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이다. 세속의 가식과 때를 벗어던지고 완벽한 자유를 구가하고 있으니 말이다. 바로 이 장면에서 비발디의 <세상에 참 평화 없어라>가 발산하는 효과는 그야말로 압권이다.



글 진회숙(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