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문화, 예술, 대중문화, 라이프스타일까지 따라하기 열풍뉴욕에도 없는 뉴욕을 '욕망'하고 '소비'만 하는 것은 아닌지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
뉴욕의 가장 '힙'한 싱글 여성들의 에피소드를 다룬 <섹스 앤 더 시티>가 한국에 불어넣은 뉴욕 바람은 광풍에 가까웠다.

대도시에 어울리지 않게 끈끈한 우정을 자랑하는 캐리와 사만다, 샬롯, 그리고 미란다.

그녀들이 수다와 함께 즐기던 아침 겸 점심, 브런치는 이태원과 청담동을 넘어 홍대와 대학로 주변까지 파고들었다. 캐리가 뉴욕의 한 벤치에서 한 입 베어 물던 역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캐리가 400~500달러에 달하는 고가의 구두를 내키는 대로 구입하는 슈어홀릭이었던 탓에, 생소하던 마놀로 블라닉과 지미 추는 남성들에게도 익숙한 브랜드가 되었다.

집세 낼 돈은 없어도 마음에 드는 구두는 사고야 마는 캐리는 남성들에게는 '된장녀'로, 여성들에게는 '스타일 아이콘'으로 인식됐다. 한국 여성들의 유난한 캐리 사랑은, 그녀 자체에 대한 열광이기보다, 차라리 화려하게 치장된 뉴욕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동경에 가깝다.

세계 공연의 중심지로 불리는 뉴욕 브로드웨이
2004년 미국에서 종영한 <섹스 앤 더 시티>는 영화로 지속적으로 재가공되고 있으며 <립스틱 정글>이라는, 40대 전문직 여성 버전의 <섹스 앤 더 시티>의 등장도 이끌었다. 지금도, 뉴욕의 라이프스타일은 브라운관을 타고 지구 반대편의 한국에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1930년대 모던 걸 VS 2000년대 한국의 뉴요커

2002년 뉴욕을 찾은 한국인은 8만 1천 명이었지만 2007년, 26만 1천 명으로 증가했다.(뉴욕 관광청 NYC&Company) 이는 미대륙 인접국가와 유럽의 나라를 제외하면 가장 많은 숫자로, 뉴욕에 대한 한국인의 문화적 관심 등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수치다.

요즘 백화점 문화센터에는 '뉴욕 배우기'가 한창이다. 수십 개의 뉴욕 테마 강좌가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뉴욕 모던 쿠킹, 뉴욕 스타일의 모던 디저트, 집에서 즐기는 뉴욕스타일 브런치, 뉴욕식 YSM 발레 스트레칭, 핑크 네일 오브 뉴욕의 썸머 스타일, 뉴욕 스타일 크리스탈 비즈공예까지.

'뉴욕'에서 아무런 정체성도 느껴지지 않는, 그야말로 글자만 갖다 붙인 것 같은 강좌도 적지 않다. 런던과 도쿄라는 키워드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이들 강좌는 한국에서 뉴요커로 사는 방법을 한껏 치장해 늘어놓고 있다.

뉴욕에 위치한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서점가에서도 '뉴욕'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몇 년 전부터 일어난 여행기 출간 붐 속에서 뉴욕의 면면은 더욱 다채로워졌다. 한국의 여행자뿐 아니라 뉴욕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사람들과 현지 뉴요커들의 책도 속속 서점의 책장에 채워지고 있다.

올해만도 <뉴욕 걷기여행>, <(뉴욕 뷰티 에디터가 공개하는) 뷰티 가이드북>, <뉴욕에서 꼭 봐야 할 100점의 명화>, <아이가 먼저 수저 드는 뉴욕식 건강 밥상>, <뉴욕, 비밀스러운 책의 도시>, <뉴욕에서 무용가로 살아남기> 등 예술부터 밥상과 미용, 서점으로까지 세분화되면서 뉴요커보다 다양한 정보를 한국에서 소비할 수 있게 됐다.

소비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시대, 뉴욕이란 도시도 하나의 소비 아이템이 되고 있는 것이다. 뉴욕의 식문화, 예술, 대중문화, 라이프스타일에 이르기까지 뉴욕은 적극적으로 상업화에 앞장서고 있으며 한국 소비자들은 매혹적인 아이템을 적극적으로 소비하고 있다.

높은 천장에 탁 트인 건축구조, 페인트칠을 한 내벽, 앤티크와 모던, 이질적인 소재의 매치, 일상적인 양초 사용 등으로 압축되는 뉴욕 스타일 인테리어에도 관심이 늘고 있다.

1930년대, 외모부터 사고방식까지 서구의 것으로 화려하게 치장했던 경성의 모던 보이와 모던 걸들의 뉴욕식 재현처럼 보인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2000년대 들어 눈에 띄게 자라난 한국인의 뉴욕 사랑을 미국화의 심화단계로 해석한다.

컵케이크
"미국화의 욕망은 탈냉전 시기에 들어오면서 내면화됐다. 단순한 모방과 동경, 번역의 수준에 그쳤던 냉전기 미국화는 1980년대 이후 다국적 서비스산업의 발전과 위성매체의 영향으로, 일상의 라이프스타일에서 공통의 기호를 더 긴밀하게 소비함으로써 내면화되었다."

1990년대 이후 한국 대중문화의 자생적 성장과 축적은 미국적 라이프스타일의 한국적 변용과 재가공을 가능케 했고 이를 통해 미국적 라이프스타일을 일상 수준에서 내면화했다고 이 교수는 설명했다.

뉴욕을 '소비'만 할 것인가

2000년대 한국 사회의 매혹적인 소비 아이템, '뉴욕'은 미국의 일부이기 보다 뉴욕 자체로 존재한다. 세계 금융, 문화, 예술, 미디어의 중심도시라는 뉴욕의 독특한 정체성 때문이다. 이를 기반으로 한 뉴욕은 물질주의적이고 배타적인 미국적 삶보다는 다양성과 관용의 가치와 쿨한 라이프스타일을 향유할 수 있는 곳으로 여겨진다. 덕분에 뉴욕식의 라이프스타일을 향유하게 되면 누구나 뉴요커가 될 수 있다는 판타지가 은연중에 자리잡게 됐다.

하지만 '뉴요커처럼 걷기'라는 광고문구에서 알 수 있듯, 한국이 좇는 것은 뉴욕의 피상적인 이미지에 가깝다. 결국 한국사회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유사 뉴요커'인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사회가 주목해야 할 '진짜 뉴욕'의 매력과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 헛되이 소비되고 있는 뉴욕의 허상 대신 뉴욕의 진짜 가치는 무엇이고 거기서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세계 제1의 금융도시라는 인식이 있지만, 사실 뉴욕의 절대적 경쟁우위는 문화예술에 있다. 뉴욕에 거주하는 많은 아티스트와 디자이너, 뮤지션들은 "문화예술분야에 뛰어들려면 뉴욕에 가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할 정도다. 그 덕에 뉴욕의 '컬쳐 이코노미', 즉 문화예술 산업으로 창출되는 경제는 다른 산업에 비해 월등한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 크리에이티브 산업이 도시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이 그만큼 큰 것이다.

1940년대 이후 뉴욕에서 문화예술분야에서 활동하는 노동력은 전체 노동력과 비교해 지속적으로 증가해왔다. 뉴욕에서 네 번째로 큰 영역이다. 노동력에서 따지면 금융산업 다음이다. 강력한 문화예술의 흡입력은 인구이동까지 부추기고 있을 정도다. 문화예술이 뉴욕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이 상당함을 시사하고 있다.

1980년대 초반까지 뉴욕의 예술가들은 프랑스 사회학자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상징적 자본(symbolic capital)이라고 말한 경제적 보상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예술을 위한 예술'을 해왔다. 뉴욕의 문화와 예술이 상품으로 바뀐 시기는 1980년대 중반이다.

길거리 문화와 그래피티는 경제적 가치로 환산됐고, 앤디워홀을 위시한 팝아티스트들은 엄청난 양의 작품을 비싼 값에 팔아 치웠다. 이때부터 우리는 미국, 그 중에서도 뉴욕의 문화를 흡입해왔다. '문화의 상품화'는 해를 거듭할수록 가속화되고 있다. 인터넷이나 해외여행 등으로 문화 교류가 쉬워지면 쉬워질수록 뉴욕의 문화는 더 가까워진다.

하지만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뉴욕의 문화예술의 핵심이자 파워는 '사교 네트워크'에 있다는 점이다. 지금의 브런치 스타일은 1980년대 대학교수, 학생, 예술가, 보헤미안들이 모여살던 맨해튼 어퍼웨스트사이드에서 생겨난 것으로 알려진다.

클럽 등에서 이루어진 나이트 라이프와 더불어 사교 네트워크의 또 하나의 방식이 브런치였던 셈이다. 지난 150년 동안 트렌드를 주도하고 이슈를 만드는 일이 바로 뉴욕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도 끈끈하게 얽힌 '관계'에 있었던 것.

뉴욕에 생활인으로 살아보기 전에 뉴욕이 어떤 곳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뉴욕을 알기도 전에, 매체가 쏟아내는 화려한 수식어에 방향을 잃고, 뉴욕에도 없는 뉴욕을 '욕망'하고 '소비'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짜가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시뮬라크르의 시대, 우리가 뉴욕으로부터 흡수하고 있는 것이 문화 혹은 실체가 아니라, 문화의 부산물 혹은 판타지라는 것은 씁쓸한 일이다.

참고 도서
너 자신의 뉴욕을 소유하라 – 탁선호 저
세계의 크리에이티브 공장, 뉴욕 – 엘리자베스 커리드 저
스위트 인테리어 인 뉴욕 – 아오키 레이코 저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