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아트 프리즘] 전통 예술의 관행을 흥겹게 위반하는 사운드 아트

태싯, 'Game over'
1895년 뢴트겐(Röntgen)은 진공관 실험을 하던 중 우연히 이상한 빛을 발견하였다.

매우 짧은 파장의 이 빛은 보통의 빛과 달리 상대적으로 밀도가 낮은 물체들을 투과해버렸다. 예컨대 사람의 인체 중에서 살이나 수분처럼 밀도가 낮은 물체는 통과하지만 뼈처럼 밀도가 높은 물체들은 반사되는 것이다.

지금도 병원에서 흔히 사용하는 X선이 바로 이 이상한 빛이다. 그런데 이 광선이 X광선이라 불리는 이유는 이러하다. 당시로서 이 빛의 실체를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었다.

사람의 몸이나 밀도가 낮은 물건들을 그냥 통과해버리는 빛이 있다는 것은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뢴트겐은 이를 '엑스'광선(X-Ray)이라고 불렀다.

기존의 학설이나 범주로는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명칭으로 불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프 파이프를 타고 아슬아슬한 묘기를 펼치는 인라인 어그레시브 경기나 레슬링도 아니고 권투도 아닌 더군다나 유도도 아닌 말 그대로 이종 격투기가 '엑스' 스포츠라고 불리는 이유도 똑같다.

백남준, '다다익선'
'엑스' 스포츠는 단순히 새로운 스포츠가 아니다. 그것은 기존의 스포츠 범주나 장르 자체가 마구 섞여져 존재하는 규정할 수 없는 이질적인 스포츠다. 말하자면 레슬링의 특성을 지니면서도 동시에 레슬링의 규칙을 위반하고 있으며, 권투의 특성을 지니면서도 동시에 권투의 규칙을 위반하고 있는 것이다.

미디어 아트는 엑스 광선이나 엑스 스포츠처럼 처음부터 기존 예술의 규칙을 위반하는 것이었다. 백남준의 경우만 하더라도 그가 텔레비전을 전시하였을 때 그것은 위반이었다. 텔레비전은 뒤샹의 변기처럼 단순한 기성품(레디 메이드)의 의미만 지니는 것은 아니다. 텔레비전은 이미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전시는 조각도 아니다. 그렇다고 회화는 더더욱 아니다. 텔레비전은 이미지를 담고 있는 틀이기 때문에 오히려 캔버스와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백남준의 예술은 근본적으로 기존 예술의 규칙들을 위반하고 있다.

미디어 아트가 위반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이 바탕으로 하는 뉴미디어 자체의 특성과 관련이 있다. 과거의 매체는 단일한 장르에 국한이 된 것이었다. 가령 유화나 캔버스는 오로지 시각적 이미지를 담는 매체였을 뿐 그 속에 소리를 담을 수는 없었다. 음악의 경우에도 악기는 오로지 소리라는 청각 현상만을 만들 뿐이었다.

그러니 음악은 오로지 귀를 위한 예술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텔레비전이나 다양한 영상기기 혹은 컴퓨터와 같은 디지털 매체는 이미 처음부터 이미지와 소리가 결합이 되어있다. 그것은 소리만을 위한 매체이거나 시각 이미지만을 위한 매체가 아닌 것이다. 미디어 아트는 당연히 이미지와 소리의 엄격한 구분에 바탕을 둔 기존의 예술 규칙을 위반할 수밖에 없다.

뭉크, '절규'
고전음악 작곡이론을 전공하고 네덜란드에서 전자음악을 공부한 장재호 교수와 테크노 음악으로 대중가요계에 알려진 가재발을 중심으로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생들이 참여한 프로젝트 그룹 '태싯'(Tacit)의 작업은 사운드 아트로 분류된다. 하지만 사운드 아트로 분류되는 사실 자체가 매우 역설적이기도 하다.

사운드 아트는 '엑스' 광선이나 '엑스' 스포츠처럼 여러 개의 장르들이 혼합된,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떤 장르에도 가둘 수 없는 이질적인 예술이기 때문이다. 태싯의 공연을 보면 이러한 상황이 더욱 실감나게 이해된다. 이들 연주자들은 연주라기보다는 게임을 즐기거나 채팅을 하기도 하며, 실시간 카메라로 관객을 비추고 관객의 이미지를 음악과 함께 변형시키기도 한다. 따라서 이들의 작업을 단순히 컴퓨터 전자음악으로 분류할 수 없다.

이들의 작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운드 아트는 음악의 한 부류가 아니다. 그렇다고 사운드 아트는 전통적인 음악이나 회화도 아닐 뿐더러 단순한 퍼포먼스도 아니다. 마치 이 모든 것들이 아예 하나의 작업으로 결합되어 있으며, 음악은 소리의 예술이며 회화는 시각 이미지의 예술이라는 도식을 거부한다.

물론 이러한 도식을 거부하고 들리는 그림을 그리려거나 보이는 음악을 만들려는 시도는 예전부터 존재하였다. 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고흐나 뭉크도 여기에 포함된다. 가령 뭉크의 그림 '절규'는 단지 보는 그림이 아닌 듣는 그림이다.

뭉크는 그 그림을 통해서 결코 절규하는 사람의 모습을 재현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그의 그림은 절규하는 사람의 비명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말하자면 그 그림은 절규하는 모습이 아닌 절규의 비명 자체를 전달하는 것이다. 드뷔시 또한 음악을 통해서 단지 소리가 아닌 하나의 장면 혹은 인상을 전달하고자 하였다.

칸딘스키, '구성'
음악과 회화, 퍼포먼스 등의 다양한 결합이 본격적으로 시도된 것은 20세기 이후의 일이다. 칸딘스키의 회화는 노골적으로 음악을 모델로 삼았으며, 피에르 셰페르의 구체음악은 일상적인 소리들을 사용하여 구체적인 상황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한 마디로 소리와 이미지를 뒤섞어 놓아 회화를 음악으로, 음악을 회화로 만들려 한 것이다. 이들이 이런 작업을 시도한 것은 그저 기존의 장르를 섞어서 퓨전의 장르를 만들려는 의도 때문이 아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미지들이나 현상들은 원래부터 섞여 있다. 어떤 색을 볼 때, 사람마다 다를 수는 있지만, 따뜻함을 느끼거나 차가움을 느끼며, 우울함 혹은 경쾌함을 느낀다. 형태를 볼 때도 형태만이 아닌 리듬감을 느낀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이미지를 듣고 소리를 보고 있다.

원래부터 모든 이미지와 현상은 소리, 색깔, 형태, 맛, 감촉 등이 어우러져 존재한다. 어느 것 하나만을 떼어놓을 수는 없다. 이제껏 장르화된 예술은 이것들 각각을 떼어놓으려 하였다. 그러다 보니 각각의 예술 장르는 어느 한 감각만을 기형적으로 극대화하려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사운드 아트는 바로 기존의 예술이 단일 감각의 기형적 생산만을 낳는 경향에 저항하여 실험되는 예술의 한 형태이다. 따라서 사운드 아트는 기존의 서양음계에서 사용하던 매끈한 음들에만 집착하지 않으며, 고상한 화음의 나열이 곧 좋은 음악이라는 전통적 도식도 거부한다. 사운드 아트는 매끈한 음과 소음의 경계도 허물며, 나아가 소리가 단순히 귀를 위한 청각적 현상일 뿐이라는 도식마저도 거부한다.

사운드 아트는 음이 하나의 시각적 이미지로 표출되거나 문자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음악은 단순히 악보를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수행한다. 이런 면에서 사운드 아트의 공연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사운드 아트의 퍼포먼스만이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즉흥적이고도 우발적인 하나의 사건을 창출하는 것이다. 그러한 우발적 사건으로서의 퍼포먼스는 태싯의 작품 '게임 오버'에서 테트리스 게임과 같은 오락으로 수행된다. 이들의 연주는 단순히 정해진 악보를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이라는 퍼포먼스를 행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이들이 강조하는 또 하나의 측면은 '생성음악'(generative music)이라는 것이다. 포괄적인 맥락에서 생성예술은 예술작품의 창작자가 하나의 시스템만을 만들 뿐 작품 자체의 결과를 모두 다 총괄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축구에서 감독의 역할을 생각해 보자.

감독은 하나의 전술 체계, 가령 4-4-2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다. 이는 미드필드의 역할을 강화하는 체계이다. 하지만 이 체계는 상대편의 전술에 따라서 혹은 그날의 상황에 따라서 어떠한 방식으로 실현될지 모른다. 과거 고전주의 시기에는 세세한 연주진행 상황을 모두 악보에 새겨서 작곡가가 모든 것을 통제하고 연주자가 자신의 명령에 따라 연주하게 하였다.

하지만 디지털 음악에서는 작곡가가 기본적인 알고리즘만 제시하고 시스템을 구성하면, 연주는 임의적으로 상황에 따라서 다양하게 수행될 수 있다. 즉 상황에 따른 퍼포먼스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디지털 악기는 매우 정교한 알고리즘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기계론적인 음악이지만, 오히려 디지털은 그러한 퍼포먼스를 만들어내기에 매우 적합한 악기이다. 왜냐하면 디지털 매체의 장점은 얼마든지 변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음악이 전통적인 음악과 달리 퍼포먼스적인 성격이 강하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은 바로 디지털 악기의 특성 자체에서 비롯된다.

태싯 그룹의 연주는 바로 그러한 우발적 퍼포먼스의 특성을 최대한으로 활용한다. 또한 음악 자체로 볼 때는 마치 재즈음악에서의 잼과도 같이 매우 자유롭고 독립적인 여주를 통해서 강제적 질서가 아닌 하나의 자율적이면서도 느슨한 질서를 추구한다.

이들의 작품 'In C'는 미국의 작곡가 테리 라일리의 곡을 디지털 악기로 연주한 것이다. 이 곡은 C 장조로 이루어진 간단한 멜로디를 모티브로 계속 변형하여 반복되는 미니멀리즘 곡이다. 미니멀리즘의 가장 큰 특징은 최소패턴의 '토톨로지'(동어반복)이다. 이는 어느 세세한 것에 반복적으로 집착하는 편집증 혹은 강박적인 패턴이다.

음악에서 미니멀리즘의 대표적인 형태는 바로크 시대의 오스티나토인데, 이 말의 의미만 봐도 강박적인 것과 연결되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세세한 것에 대한 강박적 집착은 마치 사이코패스적인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실은 현상이나 이미지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낳는다.

가령 동일한 색을 미묘한 변화만 주면서 반복해 보자. 지금껏 느끼지 못했던 파란색의 따스함을 발견할 수 있다. 말하자면 색 자체에서 단순히 색이 아닌 온갖 소리와 감촉 혹은 감칠맛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은 색이 시각 이미지라는 고정 관념에 대한 위반하고 미지의 X 세계로 들어가는 길이다.



박영욱 연세대학교 미디어아트연구소 HK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