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ssic in Cinema](15) 영화 <호로비츠를 위하여>속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어둠 속에서 희망 찾게 해 준 사람에 대한 감사의 마음 표현

음악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속에 '닮고 싶은' 우상을 하나씩 품고 산다. 아무리 연마해도 도저히 그 경지에 오를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사람의 연주를 들을 때마다 마음속으로 주문을 왼다. "나도 언젠가는 저 사람처럼 될 거야"라고.

<호로비츠를 위하여>에 나오는 서른 살 노처녀 지수는 음대 피아노과 출신이다. 그녀의 우상은 러시아 출신의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학창 시절부터 자기도 언젠가는 호로비츠처럼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될 것이라고 다짐했지만 서른 살을 맞은 지금, 그녀의 현실은 젊은 시절의 꿈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진 곳에 와 있다.

피아니스트로 성공한 친구들을 보며 열등감에 사로잡힌 채 예식장 피아니스트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던 그녀는 결국 궁여지책으로 변두리에 조그만 피아노 학원을 차린다.

변두리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면서도 그녀는 피아노 전공자만 가르칠 것이라고 큰소리를 친다. 어쩌면 이것은 이미 꿈을 포기해 버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인지도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지수 앞에 구세주가 나타난다. 수시로 학원에 들어와 말썽을 피우고 달아나는 경민이라는 아이다. 우연히 경민이가 절대음감을 가진 천재 소년이라는 것을 알게 된 지수는 그 순간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된다.

경민이를 통해 자기가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어 보겠다는 희망이다. 지수는 만약 경민이를 유명한 콩쿠르에 입상시키면 자기는 흙 속의 진주를 찾아낸 유능한 선생으로 사람들의 인정을 받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지극정성으로 경민이를 가르친다.

그러나 남모를 마음의 상처를 안고 있는 경민이는 호락호락 지수의 욕심을 채워주지 않는다. 콩쿠르 대회 날, 무대에 올라간 경민이는 피아노를 쳐보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주저앉는다. 무대를 비추는 조명을 보는 순간 부모와 함께 교통사고를 당했던 순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경민이를 통해 자신의 꿈을 펼치려던 지수의 바램은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크게 실망한 지수는 경민이에게 앞으로 다시 자기를 찾아오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이미 음악을 통해 경민이와 끈끈한 유대감을 갖게 된 지수는 결국 경민이를 다시 받아들인다. 그 후 경민이는 그의 천재성을 알아본 한 외국인의 도움으로 독일로 유학을 떠난다.

그로부터 몇 년 후,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되어 고국으로 돌아온 경민. 그 화려한 금의환향의 무대에서 경민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한다. 객석에 앉아 경민의 연주를 듣던 지수는 마치 자기가 무대 위에 앉아 피아노를 치는 것 같은 흥분에 휩싸인다. 사실 경민이는 지수가 좌절의 끝에서 만난 희망이었다. 그 희망의 결실을 눈앞에서 확인하는 순간, 지수는 벅차오르는 감동에 눈시울을 붉힌다.

여기서 경민이가 연주하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작곡가가 기나긴 좌절의 시간을 극복하고 쓴 역작이다. 첫 번째 교향곡에 대한 혹독한 비판에 충격을 받아 더 이상 작곡을 하지 못하게 된 라흐마니노프는 한 정신과 의사의 도움으로 정신 쇠약에서 벗어나 다시 작곡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완성한 것이 바로 피아노 협주곡 2번인데, 라흐마니노프는 이 곡을 자신을 치료한 정신과 의사에게 헌정했다.

이 곡의 도입부는 장중하고 무겁다. 하지만 그 후 음악은 여러 차례 듣는 사람의 가슴을 벅찬 감동, 찬란한 흥분으로 몰고 간다. 이 곡이 던져주는 음악적 메시지는 너무도 강렬하다. 마치 깊고 어두운 심연으로부터 뜨거운 것이 솟아올라 가슴 한복판에서 처절하게 부서지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런 다음 피날레로 숨 가쁘게 달려간다.

그리고 마지막에 짧지만 화려하고 강렬하게 종지부를 찍는다. 어둠 속에서 희망을 찾게 해 준 사람에 대한 찬란하고 화려한 음악선물.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의 의미는 이렇게 요약된다. 영화 속 경민이의 연주도 이런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닐까.



글 진회숙 (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