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과 쉼>캘리그라퍼 여태명, 김종건, 이상현, 한글작품 선보여

여행이 우리를 가장 즐겁게 할 때는 언제일까? 떠나기 전 현지 기후를 검색하며 입을 옷을 챙길 때? 수십 개의 노점 음식을 앞에 두고 고민할 때? 군중들 사이에서 둘이서만 알아 들을 수 있는 말로 대화할 때?

알랭 드 보통의 경우 그 즐거움은 공항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여행의 기술> 중 암스테르담의 스히폴 공항에서 내려 터미널 안으로 몇 걸음 뗐을 때 발견한 안내판의 모습에 대해 기술했다. 그것은 입국자 대합실, 출구, 환승 수속 창구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노란색 바탕의 단순한 플라스틱 간판이었다.

"이국적 정서는 특정한 곳에서 나온다. Aankomst(도착)에서 a를 두 개 쓰는 것에, Uitgang(출구)에서 u와 i가 잇달아 나오는 것에, 프루티거체나 유니버스체 같은 실용적이면서도 모더니즘 냄새가 나는 글자체를 사용한 것에…특히 이 a의 반복에서 나는 다른 역사, 다른 사고 방식의 존재를 느끼며 혼란을 경험한다."

이국의 글자는 우리를 두렵게 하는 한편 말할 수 없이 설레게 한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아니 아예 어떻게 읽어야 할지조차 알 수 없는 한 무리의 그림들은 이제 진짜로 완전히 다른 세계 속으로 떨어졌다고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6월 24일부터 라마다 호텔 & 스위트에서 열리는 <한글과 쉼> 전시에서는 캘리그라퍼 3인이 쓴 한글이 휴가를 보내기 위해 서울을 찾은 외국 관광객들을 맞이한다. 그들은 한국의 건축물, 한국의 말, 한국의 음식에 감탄하기 전에 가장 먼저 한글을 보고 놀라야 한다. 효봉 여태명, 삼여 김종건, 새터 이상현이 '휴식'과 '먹'이라는 두 가지 주제를 받아 전시에 참여했다.

김종건 '나무폭포숲'
"한글은 전 세계의 글자 중 유일하게 받침이 있는 글자입니다. 글씨를 가지고 작업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한글의 이 '시각적 산만함'은 가장 흥미로운 요소이지요."

캘리그라퍼 이상현에 의하면 한글의 모양은 리듬 그 자체다. 획수에 따라, 많으면 덩어리로 보이고 적으면 작대기 몇 개를 그어 놓은 것처럼 미니멀하다. 먹으로 쓰면 한글은 숫제 춤을 추기 시작한다. 처음 붓을 먹에 찍어 종이 위에 그을 때의 묵직한 축축함, 그리고 시간이 흘러 먹이 다 떨어지면서 나오는 갈필의 거칠음. 의미 전달의 도구로만 남아 있기에 한글의 형태는 너무나 변화무쌍하다.

춤추는 오브제, 한글

"모든 글씨에는 표정이 있습니다. 행복이라는 글씨는 정말 행복하게 생겨야지요. 솜털은 솜털처럼 가볍게 쓰고, 바위는 바위처럼 무겁게 써야 합니다."

여태명 작가는 쉼을 행복이라고 정의했다. 일상의 중단, 일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닌 삶의 연장 속에서 느끼는 행복과 사랑, 기쁨을 바로 휴식이라고 생각한 것. 그가 쓴 행복이라는 글자에는 'ㅎ'이 두 개다. 혼자 있어서는 행복할 수 없기 때문에 두 개를 넣었고 그렇게 해서 행복은 정말로 행복해졌다.

여태명 '쉼'
한지에 먹으로 표현하는 것 외에도 두꺼운 종이에 칼로 새기는 기법을 활용해 한글은 음각과 양각을 가진 입체 조형물이 되었다. 조근조근 속삭이듯이 작게 쓴 글씨에서 작가가 지향하는 연인의 정, 가족 간의 정이 묻어 나온다.

이상현 작가의 휴식은 자연이다. 인간에게 넉넉한 휴식을 제공하는 나무를 묵상하다가 문득 그 나무를 존재하게 하는 뿌리에 대해서는 너무 무관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한글의 뿌리인 자음과 모음을 활용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우리의 눈에 한글의 자음과 모음은 의미만 전달하고 사라져버리죠. 하지만 외국인들의 눈에는 다릅니다. 그 형태와 배치 하나하나가 새롭게 다가올 거에요."

보는 사람의 눈에도 휴식을 주기 위해 작가는 시꺼먼 먹보다는 자연스럽고 은은한 발묵(먹물이 번지어 퍼지게 하는 산수화법) 효과를 노렸다. 이를 위해 그는 그을음을 긁어 직접 먹을 만들었다. 부드럽게 퍼지는 수제 먹으로 나무를 그리고 그 위에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빽빽하게 배치했다. 그것은 이파리 같기도 하고, 꽃 같기도, 나무 사이에 깃드는 바람 같기도 하다.

김종건 작가 역시 자연 속에서 쉬고 싶어했지만 그의 자연은 좀 더 원시적이고 힘에 넘친다. 나무, 숲, 폭포라는 글자는 각기 나무, 숲, 폭포의 형상으로 바뀌어 사각의 틀 안에 배치되었다. 폭포를 떠받치는 모음 'ㅗ'는 폭포처럼 길고 박력 있게 떨어지고 그 옆에 숲의 위를 덮는 자음 'ㅅ'은 산처럼 고즈넉하게 자리했다.

이상현 '나무'
한 구석에 자그맣게 쓴 시구는 구름무리다. 그의 시그너처 작업인 꽃 시리즈도 만날 수 있다. 그는 5년째 500가지 형태의 꽃 글자를 만드는 중인데 이른바 한글의 '상형문자화'다. 그가 쓴 꽃 중에는 김춘수의 '너에게로 다가가'는 꽃도 있고, 스프레이를 뿌려 글 속에서 번지듯 피어나는 꽃도 있다. 올해 안에 1000개의 꽃을 피우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

꽃처럼, 폭포처럼 펼쳐진 한글은 언뜻 봐서는 글인지 그림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어떤 이들은 곁눈으로 보고 단순한 서예 작품으로 생각하며 바로 엘리베이터로 직행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여행이 진행되고 간판, 메뉴판, 관광 안내문 등 서울을 온통 덮고 있는 한글을 접하면서 여행객들은 '어디선가 본 듯한 '묘한 기시감을 느낀다. 그리고 자음과 모음의 형태와 그 특징적 결합에 드디어 눈이 익는 순간 여행 첫날 자신이 본 것이 글씨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지북(zibook)이 주관하는 이번 전시는 숭례문 근처 라마다 호텔&스위트 서울 센트럴 1층 로비와 24층 레드 스퀘어에서 8월 10일까지 계속된다.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