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ssic in Cinema] 청각장애인 여성과 장애인 학교 교사 진정한 '소통'의 가능성 물어(17) 영화 <작은 신의 아이들> 속 바흐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의 2악장

작곡가 중에서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 J.S.바흐만큼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은 작곡가도 없는 듯하다.

그는 18세기 사람이지만 그의 음악은 300여 년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변치 않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 영화음악 분야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그렇다. 바흐의 음악은 영화음악 담당자들에게 무궁무진한 영감의 원천이다.

원곡을 그대로 연주한 것에서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편곡한 것에 이르기까지 바흐의 음악을 사용한 영화는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이다.

말리 매트린 주연의 영화 <작은 신의 아이들>도 그런 영화 중 하나다. 이 영화에는 바흐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의 2악장이 나온다. 이 곡을 배경으로 영화는 우리에게 묻는다. 음악을 통해 인간과 인간 사이에 진정한 '소통'이 가능한 것인가를.

<작은 신의 아이들>은 세상의 편견을 뛰어넘은 청각장애인 여성과 장애인 학교 교사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이다. 실제 청각장애인인 말리 매트린이 여주인공 사라 역을 맡아 열연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어느 작은 마을, 청각 장애인 학교에 젊고 유능한 제임스 리즈가 부임해 온다. 학생들을 열정적으로 가르쳐 학교의 신임을 받게 된 제임스는 어느 날, 이 학교 졸업생으로 매사에 반항적이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라를 만나게 된다. 사라의 매력에 한 눈에 매료당한 제임스는 그녀에게 다가가지만 사라는 이런 그를 경계의 눈빛으로 바라보며 끝내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제임스는 그녀의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사라는 결국 오랫동안 빗장을 걸어두었던 마음의 문을 열고 제임스를 받아들인다. 그 후 두 사람은 한집에서 살게 된다.

어느 날 두 사람의 집에 제자들이 찾아온다. 제자들은 TV를 크게 틀어놓고 팝콘과 콜라를 먹으며 스포츠 중계방송을 본다. 제임스는 그 소음에 넋이 나갈 지경이지만 듣지 못하는 사라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제자들이 떠나고 난 후, 집은 갑자기 정적에 휩싸인다. 그러자 제임스는 말한다.

그동안 수화를 하느라 힘들었던 자기 손을 쉬게 하고, 이제 음악을 들을 것이라고. 오랜만에 찾아온 정적의 시간에 자신만을 위한 휴식을 가질 것이라고. 그리고는 턴 테이블에 바늘을 올려 놓는다. 그 순간 바흐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의 2악장이 방 안 가득 울려 퍼진다. 음악을 듣는 제임스는 잠시 황홀에 빠진다. 듣지 못하는 사라도 마치 음악을 듣는 듯한 표정을 하고 조용히 앉아 있다.

하지만 그 순간 제임스는 음악을 꺼버린다. 이런 제임스의 행동에 사라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가 말한다. 이 아름다운 음악을 당신과 함께 할 수 없어 슬프다고. 이렇게 제임스가 실망하고 있는데, 다시 음악이 들려온다. 사라가 틀어놓은 것이다. 곡은 바로 조금 전에 들었던 바흐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의 2악장.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사라는 제임스에게 말한다. 자기에게 음악을 보여달라고. 음악을 보여달라고? 제임스는 몸으로 음악을 보여주려고 한다. 그러나 곧 부질없는 일임을 깨닫는다. 어떤 몸짓으로도 바흐 음악의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없기 때문이다. 사라는 실망하는 제임스를 위로한다.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이 장면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소리의 세계와 침묵의 세계. 서로 전혀 다른 세계 속에 살고 있는 두 사람. 한 사람은 음악을 듣지 못하고, 다른 한 사람은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이 '다름'은 너무나 본질적이고 근원적이어서 그 어떤 노력으로도 극복할 수 없다. 제임스는 그 불가능에 대해 절망한다. 하지만 사라는 이런 그를 위로한다.

왜? 그녀는 음악을 들어본 적이 없기에, 아예 근원적으로 그런 경험을 차단당한 채 살아왔기에 그 절망이 어떤 것인지조차 가늠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무리 사랑하더라도 함께 나눌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 이 장면에서 흐르는 바흐의 음악은 그 근원적 슬픔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글 진회숙 (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