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일 <폭발하는 청춘> 전열정은 장렬했으나 시대에 꺾이고 음악은 멍처럼 남은 세대에 대한 헌사

'그룹사운드 He5' (자료제공=조용남)
이기일 작가의 작업실에 들어서면 대형 판넬에 프린트된 세 명의 청년이 손님을 맞는다. 더벅머리에 미니멀한 수트까지 비틀즈를 빼다 박은 그들은 1960년대 중반 활동했던 그룹사운드 '김치스'다.

전쟁 직후 한국에 주둔한 미군 부대에서 비틀즈의 모습으로 비틀즈의 노래를 불렀던 카피밴드. 그러나 우습게 볼 일이 아니다. 저들의 눈빛은 흑백 사진을 뚫고 나올 것처럼, 장렬하다. 이기일 작가가 덧붙였다.

"비록 자기 음악은 없었지만, 자기 음악을 하고야 말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죠. 표정만 봐도요."

바로 저런 그룹사운드가 한국 대중문화의 한 뿌리다. 1960~70년대 한국의 대중음악은 일종의 '혁명'을 겪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당시 세계를 뒤흔든 팝문화 유행의 영향 하에 있었지만 미군 부대가 주둔한 정치적 상황, 전쟁으로 억눌렸던 자유를 갈망하는 사회적 분위기 등이 얽힌 상태였다.

문화연구자 신현준은 <한국 팝의 고고학>에서 "1960~70년대에 청년기를 보낸 세대는 이전 시기나 이후 시기에 비해 음악이 특히 중요했던 세대"라고 지적한다. 음악이 자신을 표현하고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수단이자 매개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의 그룹사운드도 폭발적으로 늘었다.

'그룹사운드 문화의 중심지였던 음악 살롱 OB's Cabin'
1967년생인 이기일 작가에게 당시의 기억은 "형과 삼촌이 통기타치는 모습"으로 남아 있다. 작가 세대까지 '차례'가 오지 않았던 것은 1970년대 중반부터 박정희 정권의 '사회 정화'에 의해 그룹사운드 문화가 침체되었기 때문이다. 뮤지션 신중현을 마약 사범으로 구속한 '대마초 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국민을 건전하고 성실한 산업 역군으로 재조직하려던 정치 권력에게 그룹사운드들을 중심으로 번져 나간 히피 문화는 눈엣가시였다.

그렇게 전과자가 된 뮤지션들은 5년 이상 공식적으로 활동할 수 없었고, 차라리 도미하거나 산 속으로 숨어 들었다. 고고클럽, 살롱 등의 라이브 무대는 사라졌다. 이기일 작가 세대는 이런 흥망의 경계에 있었던 셈이다. 작가가 음악뿐 아니라 음악을 둘러싼 정황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작가는 3년째 1960~70년대 그룹사운드의 행적을 쫓고 있다. 흩어져 있는 단서들을 모으고, 당시 뮤지션들을 찾아냈다. 문화적 단절을 잇고, 묻혔던 역사를 살리는 일이다. 지난해 초 자료들을 바탕으로 <괴짜들: 群雄割據(군웅할거) 한국 그룹사운드>라는 전시를 열기도 했다.

7월14일부터 갤러리조선에서 열리는 <爆發(폭발)하는 靑春(청춘)>은 기존 자료에 이기일 작가의 이해와 해석을 더한 전시다. 열정은 장렬했으나 시대에 꺾이고 말아 음악이 멍처럼 남은 한 세대에 대한 헌사이기도 하다. 전시 내용 중에는 '신중현과 엽전들', '사랑과 평화' 멤버로 70년대 굴곡의 세월을 지났고 올해 초 암으로 돌아간 고 이남이 뮤지션의 인터뷰도 포함되어 있다.

"음악이 자신을 전과자로 만들었기 때문에 음악에 대해 좋은 기억만 가지신 분은 없어요. 어떤 분들은 인터뷰를 거절하시기도 했죠. 이남이 선생님 같은 경우에는 대표곡 중 하나인 '울고 싶어라'의 창작 배경을 묻자 '가사 중에 다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한이 있는 거죠. 아마 제 인터뷰가 거의 마지막 인터뷰였을 거에요."

'OB's Cabin의 광고 전단'
이기일 작가의 컴퓨터에는 대중음악을 경유한 당시 사회상이 수두룩했다. 방송사에서 흘러나와 청계천에서 팔리던 LP 판에는 금지곡마다 흰 띠가 붙여져 있었다. "냉방이 완비되었으니 여름 휴가를 여기서 보내시라"고 권하는 라이브 클럽 광고 전단도 있다. '양키스' 같은 혼혈인 밴드도 인기였다.

"60년대 중반까지는 미군부대 내에서만 공연이 열렸는데, 60년대 후반부터는 살롱, 고고클럽 등 일반인들도 접할 수 있는 라이브 무대가 많이 생겼어요. 뮤지션이 많이 필요한 상황이 된 거죠. 그때 개런티가 싼 필리핀인 밴드 등도 조직되었던 것 같아요."

1967년부터 1970년까지 활동한 그룹사운드 He5의 멤버들이 40년의 세월을 건너 금지곡이었던 '초원'을 부르는 장면을 담은 영상 작품은 어쩐지 뭉클하다. '초원'은 '뜨거운 그 입술'이라는 가사가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지만, 그 때문에 더 인기를 끌었던 노래. 하지만 관객의 환호 속에서 떳떳하게 울려 퍼진 적은 없을 노래. 작가는 작년 크리스마스에 He5 출신 김홍탁, 조용남 등에게 전설적인 살롱 'OB's Cabin'의 내부를 되살린 작은 무대를 선사했다.

작가의 다음 계획은 "어르신들을 모시고 비틀즈의 고향인 영국 리버풀에 가서 공연하는 것"이다. 그 과정을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 생각이다. 제목은 잠정적으로 <한국의 비틀즈, 1964>로 정했다.

"1964년은 비틀즈가 미국에 건너가 성공한 해입니다. 바로 그해 한국에서도 최초의 카피밴드 음반이 출시돼요. 당시 문화적 흐름이 세계적이었다는 걸 알 수 있죠."

'OB's Cabin의 간판스타였던 히식스' (자료제공=조용남)
그 격변을 직접 경험한 세대가 아닌데도, 이기일 작가의 애정에는 향수와 동경이 뒤섞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부럽냐고요? 그들은 뭔가 새로운 것을 처음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니까요. 이젠 더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세상이잖아요.(웃음)"

그래서 <폭발하는 청춘>은 아직 모든 것이 진부하지 않았던 시대, 모험이 가능했던 시대, 젊은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것에 자신을 불사르는 것이 당연했던 시대, 장렬함이 미덕이었던 시대에 대한 상상적 복원이기도 하다. 전시는 8월4일까지 열린다. 02-723-7133.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