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우하우스 & 모던 클래식 – 사보컬렉션>실용미학에 반한 개인컬렉터 독일서 20년간 모은 200여 작품 선보여

바우하우스 & 모던클래식
"표준화된 것을 만드는 기계는 사람들을 육체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훌륭한 수단이며 대량생산된 것들은 손으로 만든 것보다 값도 싸고 품질도 좋다. 바우하우스 공방은 대량생산을 위한 원형과 시대적인 전형을 신중하게 개발하고 향상시키는 실험소이다. 이곳에서 바우하우스는 산업과 공예 분야 모두에 능통하여 기술적인 측면과 디자인을 동시에 아우를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류의 인간을 양성하고자 한다." – 발터 그로피우스, 1926년 3월, '바우하우스 제품의 원칙' 중

20세기 초는 두려움의 시기였다. 지금 우리가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보며 느끼는 두려움과 산업혁명 당시 인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물건을 만들어내는 기계를 보며 느낀 두려움 중 어느 것이 더 컸을까?

예술가들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정신을 차리기 위해 스스로의 뺨을 찰싹찰싹 때리며 이 무섭고도 멋진 신세계 속에서 예술이 살아 남을 자리를 발견하려고 애썼다. 극단적인 환경변화가 가져오는 일종의 패닉 속에서 유연하고 진실하게, 그러나 분명한 자신감을 가지고 대처한 이들이 있으니 바로 바우하우스의 출현이다.

그들은 기성 세대 특유의 텃세나 지금까지 손에 익은 모든 예술의 방식을 과감히 버리고, '기계와 운송 수단 등 새로운 환경을 의연히 받아' 들였으며 '공간ㆍ재료ㆍ시간과 경비의 경제적인 사용'을 공식적으로 언급했다.

나치에 의해 폐교되기까지 겨우 14년간, 200명도 채 되지 않는 학생 수로 운영된 이 작은 미술학교는 그 이념의 창조성 때문에 지금까지도 다방면의 예술가들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으며, 이들 덕에 인류는 비교적 적은 진통만을 겪고 모더니즘이라는 다음 단계로 진입할 수 있었다.

작자 미상의 소파
초창기의 따뜻한 모더니즘

기계를 수용하며 한편으로 기계를 다스리고자 했던 그들의 숨결을 직접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지금 PKM트리니티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바우하우스 & 모던 클래식 – 사보 컬렉션'에서는 바우하우스의 정신을 계승한 디자이너들 - 마르셀 브로이어, 미하일 토넷, 한스 베그너, 조지넬슨 등의 작품이 전시 중이다.

놀라운 것은 의자, 테이블, 소파, 벽장, 생활 소품 등 200여 점에 달하는 전시품이 모두 한 사람의 컬렉션이라는 것. "바우하우스 이래로 디자인은 없다"고 말하는 일러스트레이터 임상봉 씨는 바우하우스의 실용미학에 반해 독일에 머무는 20년 동안 수집에 열을 올렸다.

그가 공부한 슈투트가르트에서는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을 주민들에게 살도록 내주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이웃들이 사용하는 가구가 몇십 년 전 것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모던함에 깜짝 놀라 그 매력에 깊이 빠졌다. 전시장에서는 빈티지 가구들의 진득한 나무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건 물론이고 아직까지도 작동되는 레코드 플레이어의 음악도 들을 수 있다.

당시의 모더니즘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것은 미남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훔쳐 보는 것과 같다. 뛰어난 이목구비는 촌스러운 헤어 스타일과 나팔바지에 묻혀 웃음을 자아내지만 한편으로 지금은 완전히 실종된 시간의 넉넉함과 풍류에 압도되기도 한다.

에곤 아이어만의 의자
당시로서는 혁신적이다 못해 악마적이라고 불릴 정도로 단순하고 장식성을 배제한 가구들이지만, 갖가지 파격에 시달린 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한없이 부드럽고 클래식한 면모들이다. 당대의 미니멀리스트 샤넬이 지금 한국에서 예복으로 입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랄까? 용도와 합리성을 전면에 내세웠지만 '인간의 가장 깊은 내적 경험으로서의 예술'을 숭상한 그들의 미감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한편 그 클래식함 뒤에는 기술의 발전이 생각보다 더뎠다는 배경도 숨어있다. 예술가들과 장인들은 곧 기계가 인간의 모든 일을 대신하기라도 할 것처럼 한껏 각오하고 있었지만 유리병을 만드는 기술 같은 것은 기대보다 발전이 더뎌 입으로 직접 불어서 만들어야 했던 것.

모던함으로 가득 차 있을 것 같은 전시장에서는 한낱 약병조차 장인의 입을 거쳐야 했던 옛 풍경도 엿볼 수 있다. 가구 외에 가전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특히 나무로 만든 싱크대 옆에 자리를 차지한 하얀 냉장고는 도색을 하고 크리스털로 한껏 꾸민 요즘의 어떤 냉장고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손잡이를 비틀어 열면 아직도 냉매 냄새가 물씬 풍긴다.

PKM트리니티 갤러리에서 7월20일까지 전시한다.

사진제공: PKM트리니티 갤러리
참고서적: <바우하우스> 프랭크 휘트포드 저

아킬레 까스트그리오니의 스테레오 시스템
일러스트레이터 사보 임상봉 인터뷰

- 독일에서 20년에 걸쳐 수집했다고 들었다. 주로 어떤 경로를 통했나?

작은 소품들은 주로 벼룩시장에서 샀고 큰 가구들은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모아 사기도 했다. 내가 그린 그림과 교환한 것도 있다.

- 소품들뿐 아니라 덩치가 큰 옷장도 있던데 어떻게 보관했는지?

다행히 집에 작은 와인 창고가 딸려 있었는데 그곳에 주로 보관했다. 독일의 집은 견고하게 지어져서 벽이 두껍고 습기가 전혀 차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으로 옮기면서 상태가 좀 안 좋아졌다.

- 실용미학에 반했다지만 컬렉션을 보면 전체적으로 따뜻한 느낌이다.

사보 임상봉 씨
따뜻함을 느꼈다면 제대로 본 것이다. 당대의 정신을 좋아하지만 나의 컬렉션이니 내 취향이 듬뿍 반영돼 있다. 합리적이면서도 아름답고 따뜻한 그들의 미감에 매력을 느꼈다.

- 작동되는 것이 아니면 안 샀다고 하던데?

실제로 작동되지 않는다면 바우하우스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 아닌가. 물건 중 반 이상은 구매해서 내가 실제로 사용한 것들이다. 움직이지 않는 것들은 직접 고쳐서 다시 작동하게 만들었다.

- 바우하우스가 출현한 지 거의 100년이 지났다. 요즘의 디자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난 요즘의 디자인은 없다고 생각한다. 모든 디자인은 60~70년대에 다 끝났고 요즘은 그것들의 무한한 카피만이 이루어지고 있다.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