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야 프로젝트 : 금이야 옥이야>시각 매체와 내러티브의 유기적 호흡과 교류 실험

이단 작가의 '봉인된 기억'
'손전등으로 벽에 쓰인 글을 읽고 누군가의 비밀을 펜으로 적으시오.'

두텁게 드리워진 검은 장막 앞에는 이해할 수 없는 지시가 쓰여 있었다. 검은색 커튼을 걷고 들어가자 낯선 이들의 은밀한 비밀들이 손전등 밑으로 읽힌다.

그 비밀을 공유하게 되었다는 연대감인지, 누군가의 비밀을 훔쳐보고 까발린다는 약간의 죄책감 때문인지, 검은 장막이 묵직하게 몸을 짓누른다. 벽에 적힌 몇 개의 문장을 읽고, 몇 자를 끄적이곤 그곳에서 빠져 나온다.

'그동안 내 얘길 너무 안 했나?' 여러 겹으로 드리워진 빨간 그물 아래, 작은 흙더미 속 붉은 손톱이 드러난 곳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어쩐지 잡히지 않는 단서를 쫓아가는 몽환적 소설 속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 현재 이언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열대야 프로젝트 : 금이야 옥이야>가 주는 인상이다.

이 전시가 소설처럼 느껴지는 데는 이유가 있다. 설치작가 이단을 주축으로, 백승민, 장의령, 최영빈 작가는 이번 전시를 위해 릴레이 소설을 집필했다. 한 달 반 동안 사흘에 한 번씩 필자를 바꾸어가면서 쓴 소설을 바탕으로 작품이 완성됐다.

백승민 작가의 '2단 생크림케익'
소설은 주인공인 '나'가, 소중한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후, 어떤 존재가 '그곳'으로 가면 '소원'을 하나 이루어준다는 말을 듣고 열대야에 집을 나서는 것으로 시작된다. 앞서 소설을 쓴 작가는 다음 작가에게 1~2개의 지시사항만 제시할 뿐이어서 이야기는 그야말로 각자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변신을 거듭한다.

이를 통해 장의령은 바느질, 이단은 설치, 백승민은 입체, 최영빈은 페인팅 등 다양한 매체의 작품을 완성해냈다. 그들 작품 사이, 여백의 미처럼 남겨진 벽면에는 텍스트가 적혀 있다. 작품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하듯, 혹은 이 텍스트를 통해 작품이 완성되는 듯.

"그동안 작업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나의 얘기를 어떻게 관객들에게 전달할까였다. 어떤 이야기가 전달되려면 내러티브의 역할이 중요한데, 시각 매체에서 이 내러티브를 완성하기가 쉽지 않다. 문학에서 '시' 같은 경우도 시각적 효과를 위해 폰트나 배열을 달리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시각 매체에서도 이런 식의 결합이 효과적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전시를 기획한 이단 작가의 설명이다.

작가들의 표현대로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소설을 기본으로 탄생한 작품들. 이들의 릴레이 소설이 돌림노래처럼 끝을 맺지 않듯, 아직은 낯선, 시각매체와 내러티브의 유기적인 호흡과 교류를 실험한 이 전시도 어쩐지 후속작을 남겨 놓은 것만 같다. 8월 28일까지, Eon gallery T. 02-725-6777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