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ssic in Cinema] (26) 영화 <그녀에게> 속 퍼셀의 '나를 울게 해주오'식물인간 된 연인들 돌보는 두 남자의 심정 담은 듯

"무대엔 의자와 테이블이 있었고, 흰옷 입은 여자들이 나왔어요. 눈을 감고 막 돌아다니는데 부딪칠까봐 겁났어요. 근데 갑자기 남자가 나왔는데, 어찌나 슬퍼 보이던지 세상에서 가장 슬픈 남자 같았지요. 그가 가구를 치워 주더군요. 얼마나 감동적이던지."

알모도바르 감독의 <그녀에게>는 한 남자가 침대에 누워 있는 여자에게 이렇게 얘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영화는 각기 식물인간이 된 연인들을 돌보는 두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두 남자의 이름은 베니그노와 마르코.

오랫동안 아픈 어머니를 보살피던 베니그노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우연히 창문을 통해 집 앞 발레 학원에 다니는 알리샤를 보게 된다. 이 후 베니그노는 남몰래 마음속으로 그녀에 대한 사랑을 키워간다. 그러던 어느 날, 알리샤가 교통사고를 당해 그만 식물인간이 되고 만다.

간호사였던 베니그노는 식물인간이 된 알리샤를 4년 동안 사랑으로 보살핀다. 마치 의식이 있는 사람을 대하듯 옷을 입혀주고, 화장을 해주고, 책도 읽어주고, 자기가 본 공연 이야기도 해 준다.

여기서 베니그노가 본 공연은 세계적인 안무가 피나 바우슈의 <카페 뮐러>인데, 영화는 이 작품의 공연장면으로 시작한다. 막이 오르면 흰옷을 입은 두 여자가 비통한 음악에 맞추어 비통한 표정으로 춤을 추기 시작한다. 처연한 현악기 소리에 맞추어 부르는 소프라노 아리아가 마치 통곡처럼 무대 전체에 울려 퍼지면서 두 여자의 슬픔을 극대화한다.

그 비통함이 그대로 관객에게 전달된다. 베니그노는 옆 자리의 남자가 공연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다. 훗날 병원에서 식물인간이 된 애인을 돌보면서 알게 될 마르코이다.

마르코를 울린 <카페 뮐러>는 격렬하게 슬픔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무용수들의 표정과 몸짓도 그렇지만 배경으로 깔리는 음악 역시 처연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 소프라노가 마치 통곡하듯 부르는 노래는 바로크 시대 영국 작곡가 헨리 퍼셀의 오페라 <요정여왕>에 나오는 아리아 이다.

셰익스피어의 <한 여름 밤의 꿈>에 나오는 요정의 왕 오베론과 여왕 티타니아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것인데, 은 티타니아가 요정의 왕 오베론의 사랑을 잃고 슬퍼하는 대목에서 부르는 것이다.

가사는 간단하다. 자기를 영원히 슬픔 속에서 울게 해 달라는 것이다. 바로크 오페라 아리아의 가사는 장황하지 않다. 같은 가사를 그대로 반복하거나 아니면 약간만 변형시켜 부른다. 이 노래에서는 "나를 울게 해주오"라는 가사가 여러 차례 반복된다. 그 반복이 비통의 정서를 확대재생산한다. 이렇게 처연한 비가에 오보에 독주가 첨가되는데, 애수를 띤 오보에 소리가 비가의 멜로디와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다.

피나 바우슈가 퍼셀의 아리아를 듣고 춤을 구상했는지, 아니면 춤을 먼저 구상하고 적당한 음악을 찾다가 퍼셀의 아리아를 발견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독일 부퍼탈 극장의 탄츠테아터 예술감독으로 있으면서 독특하고 혁신적인 안무를 창안했던 피나 바우슈는 사람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보다는 무엇이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가에 더 관심을 두었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춤은 춤이라기보다 의식의 내적인 흐름을 반영하는 하나의 몸짓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카페 뮐러>에서 피나 바우슈는 격렬한 슬픔을 '내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지극히 슬프지만 그 슬픔을 안으로 삭이고 또 삭이는 것이다. 그 표현방식이 춤과 함께 울려퍼지는 퍼셀의 아리아와 닮아 있다. 여기서 퍼셀의 아리아는 슬픔을 격렬하게 토해내지 않는다.

<카페 뮐러>의 주인공들이 자신들의 비통함을 내면화시키는 것처럼 퍼셀의 아리아 역시 그 슬픔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리고 있다. 이 슬픔은 나의 몫이고,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 고통 속에 깊숙이 몸 담그는 것밖에 없다는 것. <카페 뮐러>와 퍼셀의 <나의 울게 해주오> 그리고 이것을 보고 흘리는 마르코의 눈물은 이런 자각의 예술적 승화가 아닐까?



글 진회숙 (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