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40주기] 비정규직, 구직난 등 '오늘날의 전태일' 의미를 조명하는 문화행사들

최명환 'raining man-죽은 청년의 사회'
지난 한 주,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것은 G20 정상회의였다. G20을 주관하는 정부당국은 이 행사를 통해 '국격(國格) 상승'이라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마치 올림픽 같은 국제행사로 홍보하며 경제적 시너지 효과를 전망하고 들뜨기도 했다.

그러나 한쪽에서 장밋빛 꿈을 꾸는 동안, 거리에선 회색빛 구호도 오갔다. 전태일 열사의 40주기를 맞아 노동환경을 둘러싼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커졌기 때문이다. 특히 올해는 그를 단순히 노동운동의 선구자로서가 아닌, '시민'의 상징으로 다시 읽는 문화행사들이 열려 눈길을 모았다.

40년 동안 변하지 않은 '전태일의 세상'

10월 말부터 지난 13일까지 전태일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들이 연이어 이뤄졌다. 전태일 대축제, 노동영화제, 전태일 문학상 등 그의 삶을 되새기기 위한 추모행사들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이번 전태일 40주기 행사의 초점은 노동계의 영웅이자 신화가 되어버린 전태일의 반추가 아니었다. 청계천 버들다리에서 전시된 30여 점의 미술작품과 만화들은 전태일과 비정규 노동, 청년실업을 주제로 해 서울시설공단이 이를 철거하며 잡음을 빚기도 했다.

정새롬 'so'
이는 더 이상 그가 '열사'라는 신화가 아니라 이 시대의 청년들과 비슷한 비정규직 근로자였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기 위함이었다.

행사 주최 측은 "40년 동안 태일이가 세상에서 잊혀지지 않도록 애썼던 사람들,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혹은 <전태일 평전>을 읽었던 세대 등 온 세대와 계층이 공감하고 연대하는 자리를 만들자는 취지에서 이번 행사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이 같은 시선은 갤러리에서도 이어졌다. 같은 기간 갤러리 나비에서는 사회적 디자인그룹 세이브 애즈(Save As)가 기업과 국가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는 청년들의 고용실태를 말하는 <포스트 전태일은 누구인가>전을 열었다.

이 전시에 그 옛날의 전태일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대우를 받고 있는 오늘날의 청년 구직자나 사회 초년생들의 처지를 표현하며 기업과 제도의 비양심적이고 무책임한 태도에 문제를 제기했다.

르네 마그리트의 Golconde(겨울비)를 패러디한 최명환 작가의 는 취업난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청년들을 그려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청년들의 모습은 취업 스트레스와 힘겹게 싸우고 있는 20대의 현주소를 나타낸다.

전태일 열전 : 우리시대 전태일
정새롬 작가의 는 88만 원이란 가격표를 달고 일하는 청년들의 모습을 소에 비유했다.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일하고, 죽어서는 살과 가죽뿐만 아니라 피와 뼈까지 다 먹히는 소의 모습은 열심히 일할수록 병과 빚이 쌓이는 88만 원 세대와 닮아있다.

백은영 작가의 <맨버거(Manburger)>와 손혜인 작가의 <빨대 꽂기(Suck you hrough he Sraw)>는 청년들이 한 인격으로서가 아니라 기업에 착취당하고 결국엔 먹히고 마는 세태를 그렸다. 이들이 그려낸 '포스트 전태일'들의 모습은 결국 40년 전 전태일이 처한 현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오늘날을 비판하고 있었다.

그래도 다시 전태일을 응원한다

빈곤과 가난의 문제는 비단 국내만의 문제가 아니다. 40년 전 전태일이 비판했던 불합리한 구조와 제도의 문제는 이제 전 세계적인 이슈가 됐다. 서점가에도 이에 관련한 책들이 잇따라 출판되고 있다.

특히 <워킹 푸어:왜 일할수록 가난해지는가>와 <워킹 푸어, 빈곤의 경계에서 말하다> 등 일을 하면서도 가난할 수밖에 없고 가난해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 시대 워킹 푸어들의 깊은 공감을 산 바 있다.

얼마 전에는 네 곳의 출판사가 공동기획과 투자로 우리 시대 전태일의 모습을 한 권의 책에 담아냈다. 전태일의 40주기를 맞아 박정순 '철수와영희' 대표의 제안에 레디앙, 후마니타스, 삶이보이는창 등 대표적인 사회과학 출판사들이 동의해 다양한 전태일의 모습을 싣기로 한 것이다.

이들이 그려낸 전태일들의 모습은 시위 현장에서 붉은 머리띠를 맨 투사의 이미지가 아니다. 아르바이트생, 고시생, 자영업자, 취업준비생 등 지금의 평범한 20대의 모습이다.

레디앙이 기획한 '전태일 열전'은 이런 평범한 전태일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 대학 새내기인 평택의 전태일은 아나운서를 꿈꾼다. 두 아이의 아빠인 인천의 전태일은 아이들이 잘 사는 세상을 희망한다. 거제도의 전태일은 뽈찜 가게를 차려 친구들을 초대하고 싶어 한다. 전주와 부산의 전태일은 각각 검찰 공무원과 영화감독의 꿈을 꾸고 있다.

후마니타스가 기획한 '나태일&전태일'은 특이하게 만화로 진행된다. 직장인 나태일이 신입사원으로 들어온 외계인(이주노동자의 은유)과 함께 일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뤘다.

열사 전태일을 이기적이라고 말하면서도 신입사원의 근무 환경을 배려해주는 나태일의 모습은 전태일을 닮아간다. 만화는 이를 통해 전태일을 열사나 투사가 아닌 '사람을 너무 사랑했던 사람'이라고 말한다.

'인간다운 삶'이 기본이 아니라 희망이 되는 시대. 40년 전에도 똑같은 구호를 외쳤던 전태일은 이 시대에도 여전한 문제의식을 남기고 있다. 전태일은 이제 '아름다운 청년'의 박제에서 내려와 청년실업에 시달리는 모든 구직자와 사회초년생들의 이름이 되고 있다.



송준호기자 tris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