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日대표 지성 가라타니 고진 방한동아시아 평화포럼 참석차… 신작 내년 국내 번역 출간

"어제도 새벽 4시까지 <선덕여왕>을 봤습니다. 대학에서 퇴직하고 지난 4년 동안 거의 매일 한국 드라마를 본 것 같아요. 드라마와 책을 보면서 한국의 역사를 다시 알게 됩니다. 같은 기간 쓴 <세계사의 구조> 안에 한국 드라마가 꽤 도움이 된 부분이 있습니다."

일본을 대표하는 사상가 겸 문학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의 인사말은 한국 드라마로 시작됐다. '2010 동아시아 평화포럼'(5~7일) 참석차 한국을 찾은 그를 11월 5일 저녁 인사동에서 만났다.

'가라타니 고진+소주 한 잔'이란 이름으로 마련된 이 자리에 문학평론가 조영일 씨를 비롯해 도서출판 관계자들이 동석했고, 한국 드라마와 문학, 최근 집필한 <세계사의 구조>에 관한 질문이 쏟아졌다. 박유하 세종대 교수, 황호덕 성균관대 교수가 통역을 맡아주었다.

이야기는 이야기여야 한다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 지성계를 대표하는 비평가다. 대표작〈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은 미셸 푸코의 고고학 방법을 원용해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을 파헤친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근대 국민국가가 형성되고 난 뒤 국민문학이 성립됐을 거라는 기존의 통념을 깨고, 근대문학이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데 핵심 요소로 작용했음을 입증한다.

문학을 통해 국민이란 개념이 생긴 과정을 보여준 것이다. 근대문학에 사망선고를 내린 <근대문학의 종언>은 지난 2004년 국내 번역된 이후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 가장 뜨겁게 읽히는 사상서, 문학비평집이 됐다.

<근대문학의 종언>이 국내 출판된 후 많은 화제가 됐다. 그 책에서 문학의 미디어로서 기능 상실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나는 그 책에서 끝날 수 없는 정치(문학의 정치적 기능)에 대해서 말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문학이 끝났다고 읽었다. 내가 계속 말하는 것은 '당신들이 생각하는 문학' 안에는 문학이 없다는 말이었다. 끝나지 않는 정치로서의 문학은 여전히 있는 것이다. 나는 내가 문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당신들이 생각하는) 문학이 부활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10년 동안 소설을 읽지 않았다고 들었다. 마지막으로 읽은 작품은 뭔가?

"한국작가 윤흥길의 소설이었다. 내가 한국문학에 접근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나카가미 겐지(中上健之)때문이었다. 그가 죽고 일본문학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그를 통해 윤흥길의 소설을 알게 됐다."

일본의 소설은 여전히 건재하다. 매년 700권 이상 일본 소설이 한국에 번역 출간된다. 이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그게 문학이 끝났다는 증거다. 문학이 번역된다는 것 자체가 문학이 끝났다는 증거다. 지금 두 개의 서로 다른 현상이 있다. 첫째, 일본소설이 한국에 번역되는데 한국소설은 일본에 번역되지 않는다는 것, 둘째 한국 드라마는 한국에서 바보취급 당하지만, 일본에서는 인기가 있다는 것이다. 왜 일본 소설은 한국에 번역되는데, 한국 소설은 일본에 번역되지 않는가?"

한국 드라마를 보는 이유는 뭔가? 어떤 점이 재미있나?

"이야기는 이야기여야 하는데, 한국 드라마에는 이야기가 있다."

최근 작 <세계사의 구조>와 한국 드라마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한국 드라마가 모두 허구란 걸 알고 있다. 드라마는 어떤 상황이 전개되고 그 상황에 대한 폐색(閉塞) 속에서 상상하게 된다. 세계사도 그렇게 구축된다. 지금 현재를 이야기로 구성하고, 폐색 속의 상상에서 세계사는 인식된다."

황석영 작가 인터뷰 때 <근대문학의 종언>에 대해 질문한 적 있다. 황석영 작가는 동세대이지만 지역마다 발전의 속도는 다르고 한국의 근대화는 끝나지 않았다, 근대문학의 사명 역시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한국문학이 끝났다고 쓴 적은 없다. 언젠가는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썼을 뿐이다. 그 책에서 말한 문학은 소설이다. 소설은 근대 사회가 되면서 생긴 문학의 형태다. 예를 들어서 영문학의 대부분은 사실 아일랜드문학이다. 급격한 발전이나 금융위기를 경험 등 아일랜드와 한국은 비슷한 게 많다. 그리고 아일랜드에서 최근 20년간 농업인구가 절반으로 줄었다. 이제 아일랜드에 '라이트 뮤지엄'은 있어도 작가는 없다. 어떤 의미(문학의 정치적 기능)에서 아일랜드 작가가 없다고 해도 아일랜드에는 일본인 작가, 파키스탄인 작가 등 다양한 작가가 있다. 실제로 '영문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요소가 지금의 아일랜드에는 없다."

이와 동떨어진 얘기지만, 한국에 신인 작가 상당수가 문예창작과 출신이다.

"그게 종언의 징후다. 문학이 기술, 즉 배울 수 있는 것이 되어 버렸다."

통섭의 지식

1969년 나쓰메 소세키에 대한 평론으로 문학비평을 시작한 가라타니 고진은 철학·경제학·역사학·언어학과 인류학에 이르기까지 통섭적 지식을 바탕으로 현대 사회체제를 관통하는 사유를 선보인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사회주의권이 붕괴하면서 비평적 태도에 변화를 보였다. 10년 가까운 작업 끝에 내놓은 저작〈트랜스크리틱>서문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려는 과정에서 칸트를 만났다. 내가 하려고 한 것은 마르크스를 칸트적 '비판'에서 다시 생각해보는 일이었다.'
그의 말은 이 연장선에서 들어야 한다.

이번 동아시아 평화포럼에서 발표할 주제가 '국가주의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동아시아 구상'이다. 요지를 말해 달라.

"키워드는 '세계동시혁명'이다. 러시아 혁명, 프랑스 혁명 등이 이어진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세계동시혁명이 일어난 적은 없다. 마르크스는 국가를 중층구조로 생각했다. 그래서 혁명을 통해 자본주의 같은 하부구조를 없애면 상부구조인 국가와 국민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국가라는 것은 그런 중층 구조가 아니라 다른 국가에 대항하는 형태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제국주의 진행과 전쟁을 막을 수 있는 대안으로 칸트는 영구 평화론과 세계 연합을 제시했다. 이때 평화는 전쟁 없는 상태가 아니라 국가간 적대 관계가 사라지는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내가 던진 화두가 세계동시혁명이다. 국가를 내부의 힘(혁명)으로 해체한다고 해도, 다른 국가들이 먹어치워 더 큰 국가를 만드는 것으로 끝난다. 이때 혁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개별 국민국가들의 팽창 욕구를 억누를 수 있는 외부 장치가 필요하다. 국가를 지양하는, 세계연합이 필요한 것이다. 일본의 헌법 제9조와 같이 군사적 주권을 유엔과 같은 국가연합체에 증여하는 형태가 되어야 한다. 유엔은 자본과 국가에 대항해 세계국가를 제압하는 새로운 시스템이 될 수 있다."

마르크스를 통한 칸트 읽기로 보인다.

"<트랜스크리틱>이 그런 책이다. 그때 말하지 않은 게 있는데 마르크스와 칸트 사이 한 사람이 더 있었다. 헤겔이다. 책에서 칸트에서 마르크스를 읽고, 마르크스에서 칸트를 읽는다는 말을 했는데, 그 중간에 헤겔이 있고 헤겔의 앞과 뒤의 사상을 읽는다는 이야기다."

가라타니 고진의 책은 국내 1만 여부가 팔렸다. 5000권을 넘으면 베스트셀러가 된다는 국내 인문, 사회과학 출판시장에서 이 같은 사상서가 1만 부 판매를 달성했다는 건 경이적인 사실이다.

신작 <세계사의 구조>는 내년 여름 국내에서 번역, 출간된다. 고대 이집트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세계사에 대해 저술한 노작(勞作)으로 일본에서 올해 중순 출간돼 1만 5000부가 판매됐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