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My Dears...전] 70년대생 5명의 작가, 이 시대 삶을 말하는 작업들 모아

서동욱, 불 꺼진 극장의 거리, 2007
동시 상영되는 두 화면 속 남자들의 눈은 아득하다. 몸은 여기 있지만 마음은 다른 데 있다. 각자 무언가를 찾는 중이다. 오른쪽 화면의 남자는 배우 이승현을 찾고 있다.

1970년대 후반 영화 <얄개시대>를 통해 시대의 아이콘이 됐지만 80년대 중반 홀연 사라진 이다. 그가 외국에서 온갖 직업을 전전하다가 몇 년 전 돌아왔다는 소문을 단서 삼아 남자는 길을 떠났다. 하지만 옛 영화(榮華)도 명성도, 날렵한 몸과 대담한 눈도 잃어버렸을 중년의 아이콘은 좀처럼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행적은 두루뭉술하고, 약속은 번번이 취소된다. 다가간 듯 했지만 기약이 없다. 지연과 연착, 수소문 속에서 남자의 길은 미로가 되어 간다.

왼쪽 화면 남자의 손에는 '호텔 코코 비치'의 주소가 적힌 쪽지가 쥐어져 있다. 남자는 한 건물 안을 헤매는 중이다. 보이는 모습이 저 환락적인 지명과는 영 딴판이다.

차라리 디스토피아적인 공상과학물의 배경 같다. 낡고 처연하고 근대화와 기계 문명에 대한 이상이 배어 있는 곳. 세운상가다. 1960년대 말부터 1980년대 말까지 전자산업의 메카였고 한때는 미사일이나 잠수함도 만들어진다는 소문이 떠돌았지만 이제는 '세계의 기운이 모인다'는 이름이 무색하게 쇠락한 곳이다.

안정주, 숭례(崇禮), 2010
호텔 코코 비치와 세운상가, 그 과대망상적 기호들 사이에서 남자의 발걸음은 정처 없다.

우리가 서동욱 작가의 영상 작업 '불 꺼진 극장의 거리'에서 보게 되는 것은 역사의 변동과 개인의 욕망 사이에서 균형 잡으려는 치열한 태도다. 1인칭으로 전개되는 내러티브는 사적이지만, 둘레에서 환기되는 공기는 공동의 것이다.

1974년생인 작가에게 배우 이승현의 의미는 기성사회에 반기를 든 '청년문화'와 맞닿아 있으며, 세운상가의 흥망성쇠는 사회 변화의 축소판이다.

사회적인 것이 개인에게 흘러들어올 때 개인의 욕망은 사회의 단면, 하나의 구체적 현상이 된다. 남자들의 표류 역시 시대적 상황이다.

미술이 지금, 여기, 나, 우리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아름다운 것과 정치적인 것, 사회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 사이에서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가. '불 꺼진 극장의 거리'의 균형 감각은 <행복 My Dears... Happiness Consists of Being Able to Tell the Truth without Hurting Anyone> 전을 관통하는 주제다.

최기창, 반달, 2009
강석호와 김윤호, 서동욱, 안정주, 최기창 등 5명의 70년대생 작가들의 작업이 전시된다. 제목은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영화 <8 1/2>의 대사에서 따왔다. "친애하는 여러분... 행복은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으면서 진실을 말할 수 있음에 있습니다"라는 뜻이다. 그렇게 말해보자는 미술의 제안이다.

전시를 기획한 몽인아트센터 김윤경 큐레이터는 "2000년대 이후 시장 논리가 강화된 미술계에서 젊은 작가들이 어떻게 자기 목소리를 지키고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상업적 성공의 유혹에 휘둘리지 않고, 그렇다고 정치적 입장이 미학을 잠식해 버린 민중미술을 답습하지 않으면서 정직하고 인상적으로 이 시대의 삶에 대해 말하는 작업들을 모았다.

전시는 면밀한 관찰로부터 시작한다. 김윤호 작가의 '지루한 풍경 Ⅱ'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줄기차게 열리고 있는 미인 대회 풍경을 추적한 일련의 사진 작업이다.

천편일률적인 무대에서 천편일률적인 머리 모양과 몸매와 젊음을 지닌 여성들이 천편일률적인 미소와 포즈로 아름다움을 뽐낸다. 바뀌는 것은 지명과 특산물 종류뿐이다.

미인을 보는 일이 이렇게 지루할 수도 있다. 우스워 보이기도 한다. 사진의 침착하고 인내심 강한 시선은 한국사회의 미에 대한 기준이나 미를 전시하는 방법이 얼마나 고루하고 질긴지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강석호, 무제, 2008
강석호 작가의 '무제'는 TV 프로그램이나 시사주간지에서 사람들의 상반신만을 발췌해 그린 작업이다. 몸의 자세, 손 모양, 옷 같은 실마리는 상상보다 훨씬 더 상징적으로 그 사람을 보여준다. 아마도 대부분 유명하거나 권력을 가진 이들의 상반신에서는 때론 허세가, 때론 불안이, 때론 고집과 경계가 풍겨 나온다.

전시장 2층을 가로질러 걸려 있는 유리구슬 커튼은 최기창 작가의 'wobniaR'다. 영롱한 구슬들은 그 너머에 뭔가 굉장한 것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기대를 품게 하지만, 막상 뚫고 지나가기는 꺼려진다. 그 딜레마가 곧 우리가 던져진 세상이 아닐까. 그리고 드디어 헤치고 지나가자, 심지어 참담한 광경이 펼쳐진다.

대형 화면에서 남대문 모양 초가 활활 불타고 있다. 벌써 2년도 넘은 일인데도 가슴이 덜컥, 한다. 뒷면에서는 당시 화재 장면이 상영되고 있다. 차가 지나가고 소방차가 물을 뿜는 현장음이 생생하다. 사람 소리는 모두 지워져 기묘할 정도로 엄숙한 분위기다.

안정주 작가의 '숭례'다. 조악한 모양의 초는 남대문에 대한 개인의 기억을 상징한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함께 목격한 남대문의 최후. 이 둘을 접붙이는 지점에 미술이 있다.

전시장에 들어올 때와 전시장을 나설 때, 관객은 최기창 작가의 '반달'과 'Sign'을 두 번 마주치게 된다. 정면에서 보면 보름달인데 옆에서 보면 반구(半球)인 설치물과 언뜻 'RESPONSIBILITY'인 줄 알았다가 눈 비비고 다시 읽게 되는 'RESPONDNABILITY'라는 조어의 네온사인이다.

김윤호, 지루한 풍경Ⅱ, 2003
처음에는 아이러니한 유머로 다가왔지만, 마지막엔 깨달음을 준다. 평생 원 모양의 달만을 봤으면서도 달이 구(球)임을 의심치 않는 우리의 상식은 어디에서 왔을까, 곱씹게 된다.

'책임감'을 뜻하는 영어 단어 'responsibility'의 어원이 '응답하는 능력', 즉 'respond +ability' 라는 점에 착안해 나뉜 두 단어 사이에 'and' 대신 'n'을 끼워 넣었더니 우연인지 필연인지 가운데에 'DNA'가 등장했다. 책임감, 인간다움과 사회 상황에 응답하는 능력이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이라는 것일까.

미술 역시 그런 바탕 위에 있어야 한다는 것일까. 하지만 네온사인 불빛은 천진난만하고, 자태는 명랑하다. 사람들의 마음을 밝히고 간질이는 미술의 자리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일까.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해 놓곤 '뭐 이런 것쯤이야'라는 표정으로 다시 구슬치기에 열중하고 있는 어린 아이처럼, 겨우 한 줄의 분홍색 네온사인이 전시장을 나선 후에도 오래오래 기억난다.

<행복 My Dears... Happiness Consists of Being Able to Tell the Truth without Hurting Anyone> 전은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위치한 몽인아트센터에서 내년 1월16일까지 열린다. 02-736-1446~8.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