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2000년 이후 현대적 변화 이끈 9작품 공간적으로 재현한 전시

대형 어망이 전시장 한가운데 드리워져 있다. 그 안으로 들어가니 우우웅, 우우웅 소리가 들린다. 고래 소리다. 여기는 바닷속, 아니 바닷속 세계를 배경으로 한 만화 <해수의 아이> 속이다.

한쪽 벽면에는 록밴드가 주인공인 음악 만화 <벡>의 공연 장면이 상영 중이다. 자동피아노에서는 <노다메 칸타빌레>의 대표곡 베토벤 소나타 '비창'이 연주되고 있다. 일본만화 9편이 전시장에 재현됐다. 서울 종로구 화동에 위치한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망가: 일본만화의 새로운 표현> 전이다.

일본만화를 뜻하는 '망가 Manga'는 오늘날 전세계 대중문화의 중요한 원천 중 하나다. 망가의 상상력은 영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으로 번역되어 인기를 누려 왔다. <망가: 일본만화의 새로운 표현>은 또 다른 번역본에 대한 전시다.

망가의 내용과 화법, 분위기를 체험할 수 있는 설치 작품들이 선보인다. 2000년 이후 발표된 망가 중 새로운 변화를 담고 있는 9편이 전시장으로 왔다. 차례대로 따라가다 보면 망가의 저력까지 저절로 알게 된다.

크게 확대된 장면들로 관객을 맞이하는 <넘버파이브>는 "만화는 사소한 주제를 다룬다"는 선입견을 깨는 작품이다. 생태계가 파괴되어 지구의 70%가 사막인 미래를 배경으로 살아 남은 인간들 간 갈등을 그려냈다.

'넘버파이브'
최첨단 생명공학으로 창조된 초인류로 구성된 평화군 '레인보우 부대'와 그들을 배신한 저항자 간 쫓고 쫓기는 과정이 주요 줄거리. 단순해 보이는 구도지만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자아와 정의에 대한 복잡한 질문을 던진다. 이 때문에 9.11 테러 이후 세계의 화두를 담아냈다는 평을 들었다.

그 너머엔 <신만이 아는 세계>의 교실이 있다. 칠판에는 '모에'라는 신조어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다. 이는 오타쿠들이 만화와 애니메이션, 게임 등의 캐릭터에게 갖는 애정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 만화의 주인공이 혹시 오타쿠인 걸까?

<신만이 아는 세계>의 주인공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의 고수로, 게임 속 여성 캐릭터들을 사랑하는 만큼 현실에는 관심이 없다. 그런 그에게 현실 속 여성들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 임무가 주어지면서 벌어지는 일이 이 만화의 내용이다.

작가인 와카키 타미키는 스스로 오타쿠였던 경험을 작품에 녹여내고 있으며, 오늘날 점점 모호해지고 있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에 대해 묻고 있다.

보라색 배경에 아기한 장식물들이 낭만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은 <슈가 슈가 룬>의 공간이다. <슈가 슈가 룬>은 80년대 이후 쇠퇴한 순정만화를 현대에 부활시킨 것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어린 마녀들이 인간의 마음을 빼앗는 대결을 벌이며 성장하는 과정을 담았다. 최근 만화에서 점점 옅어지고 있는 과장된 장식성을 즐길 수 있는 작품.

'산만이 아는 세계'
얼마 전 국내에 개봉한 영화로도 잘 알려진 <벡>은 중학생인 주인공이 록밴드 활동을 하며 음악에 눈을 떠 가는 이야기다. 한쪽 벽면에서 이 만화의 공연 장면이 상영되고 있다.

화면 가득 그려진 의성어와 의태어, 생생한 연주 모습은 들리지 않는 소리를 상상하도록 만든다. 그 아래 놓인 기타는 만화 속에 등장하여 인기를 끈 후 실제로 시판된 것. 망가의 영향력을 증명하는 한 예다.

바다의 신비를 다루는 <해수의 아이>와 단 한 페이지 속에 일상 속 서정적인 이야기를 담아낸 웹툰 <센넨 화보>는 각각 독립된 아늑한 공간으로 표현됐다. 바닷속, 혹은 작가의 블로그에 들어와 있는 느낌을 살리기 위해서다.

<해수의 아이>는 바다에 대한 지식을 손맛이 느껴지는 그림으로 풀어내어 호평 받았고 교 마치코 작가가 자신의 블로그(http://juicyfruit.exblog.jp/)를 통해 발표한 <센넨 화보>는 인터넷 시대의 새로운 표현, 유통 방식으로 화제가 됐다.

전시장 한쪽에는 <소라닌>의 등장인물들이 살 법한 방이 있다. 막 독립한 20대 초반 젊은이들이 꾸린 것처럼 아담하고 아기한 방이다. 들여다 보고 있자니 아침마다 바쁘게 집을 나서고, 제 손으로 서툰 밥상을 차리고, 어떤 밤에는 잠이 오지 않아 한없이 뒤척이거나 애꿎은 휴대전화만 열었다 닫았다 하는 평범한 일상이 눈에 선하다.

'슈가 슈가 룬'
<소라닌>은 사회 생활 2년차인 여성과 '프리터'로 살아가는 남성 커플을 통해 일본사회의 불안과 열패감을 드러낸 작품. 사회적인 유예 기간을 겪고 있는 젊은이들의 심리를 섬세하게 표현해 독자들의 공감을 얻었으며, 얼마 전 영화화되어 국내에도 개봉했다.

다중적 이야기 구조로 주목받은 <역에서 5분>의 실험성은 미로 같은 공간으로 구현됐다. 관객들은 벽에 붙은 만화 컷들을 따라 길들을 헤매게 되는데, 이는 시간 축이 자유롭게 이동하며 한 사건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점을 제시하는 만화의 형식을 옮겨놓은 것이다.

하나조메초라는 가상의 마을 사람들을 주인공 삼아 진행되는 여러 개의 이야기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고, 교차하면서 하나의 그물망으로 얽혀 간다.

전시의 대단원을 장식하는 만화는 영화와 TV 드라마로 만들어진 <노다메 칸타빌레>. 2001년 연재되기 시작해 2009년 4월 판매 부수가 약 3000만 부에 달할 정도로 스테디셀러가 된 작품이다.

일본사회에서 클래식 음악 열풍을 일으키기도 했다. 만화 속에 등장하는 음악들로 구성된 컴필레이션 음반이 발매되고, 만화 속 오케스트라가 실제로 결성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현실에 영향을 미쳐 '노다메 현상'이라는 신조어를 낳기도 했다. 전시장에 설치된 자동 피아노는 베토벤 소나타 '비창'으로 관객의 기억을 일깨운다.

'벡'
만화를 이미 읽은 독자라면 이 여정을 더욱 흥미롭게 체험할 수 있겠지만, 아직 접하지 못한 작품이 있다고 해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전시 기간 동안 아트선재센터 1층에 만화방이 마련되기 때문. 전시된 만화들의 일본어판과 한국어판이 준비되어 있다.

<망가: 일본 만화의 새로운 표현> 전은 일본 미토미술관에서 열렸던 전시를 옮겨온 것으로, 국내 전시 후 호주와 필리핀에서도 열릴 예정이다. 이 전시를 기획한 다카하시 미즈키 큐레이터는 "망가가 단순한 오락에 불과한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했다.

"망가에 대한 해외의 수요가 급증하는 현상을 겪으며 망가 자체의 기술력 향상과 그림과 이야기를 즐기는 대중의 태도 변화를 짚어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망가의 현대적 변화를 이끈 작품들을 선정했다.

독특한 공간 구성은 일본의 전시디자이너 도요시마 히데키가 맡았다. 그는 미술 작가 나라 요시토모와의 콜라보레이션으로 널리 알려진 디자이너다. 망가를 공간적으로 해석한 전시이니만큼 일본에서는 건축, 인테리어 전공자들의 흥미를 끌었다고 한다.

<망가: 일본 만화의 새로운 표현> 전은 내년 2월 13일까지 열린다. 매일 2시부터 5시까지 한 시간 간격으로 도슨트 투어가 진행된다. 02-733-8945.

'해수의 아이'

'소라닌'(좌), '노다메 칸타빌레'(우)
'역에서 5분'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