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sive by Design' 전영국왕립예술학교 디자이너와 장애인 소통 통해 만든 작품 선보여

한 손으로 붙일 수 있는 반창고
입구 부분을 손가락으로 밀어 올려 여는 우유팩, 한 손으로 붙일 수 있도록 접혀 포장된 반창고, 빛과 소리는 물론 향기와 감촉을 느낄 수 있는 공원…. 누구에게나 편리하고 흥미로운 이 디자인 사례들은 원래 장애인과 환자, 노인을 위해 고안됐다.

관절염 환자도 쉽게 열 수 있는 우유팩, 양손을 쓸 수 없는 이들을 위한 반창고, 시각이나 청각이 없어도 즐길 수 있는 공원인 것이다. 주 소비자층인 20~30대 정상인을 겨냥한 디자인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을 포용함으로써 모두에게 득이 되는 디자인, 인클루시브(inclusive) 디자인 사례들이다.

지난 12월4일부터 12일까지 한국에는 아직 생소한 인클루시브 디자인을 소개하는 행사들이 이어졌다. 인클루시브 디자인 연구와 교육을 이끄는 영국왕립학교 헬렌함린센터가 주최한 전시와 워크숍, 세미나가 열렸다.

12월7일부터 12월12일까지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디자인코리아2010>의 일환으로 마련된 <인클루시브 바이 디자인Inclusive by Design: 배려를 통한 디자인 향상> 전은 지난 10년간 영국왕립학교가 진행한 '인클루시브 디자인 챌린지' 수상작을 모은 것이다.

'인클루시브 디자인 챌린지'는 정해진 시간 동안 디자이너와 장애인들이 소통을 통해 디자인을 만들어내는 경진대회로 매년 전 세계 곳곳에서 개최되고 있다.

손가락으로 밀어 올려 열 수 있는 우유팩
그 결과물인 관절염 환자나 노인도 한 손으로 들 수 있도록 무게를 분산시킨 냄비, 옷가게에서 시각 장애인들이 쉽게 옷 색상을 구분하도록 올록볼록한 형태로 색상을 표기한 태그 등은 디자인을 통한 사회적 포용이 어떻게 가능한지 증명한다.

단지 물리적 편의를 증진시킨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치매 환자를 위한 멀티미디어 소프트웨어는 환자의 기억을 자극할 뿐 아니라 환자와 가족, 간병인 간의 소통의 매개가 되도록 구성되어 있다.

치매 환자가 겪는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가 사회적 관계의 단절이라는 점을 꿰뚫은 것이다. 폴리머라는 신소재를 넣은 방석은 요양원 노인 등 오래 앉아있는 사람들을 위해 고안된 것이다. 폴리머는 앉은 사람의 체형에 맞게 변형되는 소재다. 이 디자인의 효용은 개인적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요양원 노인들의 상당수가 요실금을 앓고 있어 가구를 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 방석이 난처한 상황을 막아준다. 세탁이 손쉽다는 것도 이 방석의 장점이기 때문이다.

이런 배려하는 상상력은 오늘날 디자인의 미래로 꼽힌다. 영국에 인클루시브 디자인이 있다면 미국에는 유니버설 디자인, 스칸디나비아 국가에는 '모두를 위한 디자인Design for All'이라는 개념이 있다.

폴리머 소재의 방석
모두 디자인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문화에서 생겨났다. 영국의 굳건한 시민사회문화 , 베트남전 이후 상이군인의 사회복귀에 대한 미국사회의 논의, 스칸디나비아 국가의 인본주의적 전통이 그 뿌리다.

하지만 이런 공공적 디자인이 각광받는 것이 그 도의성 때문만은 아니다. 산업 영역에서도 지속가능성과 수익성 때문에 이들 디자인에서 미래를 찾고 있다.

지난 8일 서울 홍익대학교에서 열린 세미나 <인클루시브 디자인과 지속가능성>에서 헬렌함린센터의 수석연구원 줄리아 카심은 "고령화 현상은 인클루시브 디자인의 필요성을 더욱 높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늘어난 노인층이 떨어진 체력을 보완해줄 수 있는 디자인을 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더구나 기술에 대한 적응도가 높고, 트렌드에 민감한 노인이 많아지면서 이들을 위한 디자인 시장이 부상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인클루시브 디자인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기존 디자인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최우선이다. '인클루시브 디자인 챌린지'도 소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줄리아 카심 영국왕립예술학교 헬렌함린센터 수석 연구원
지난 9일부터 11일까지 한국에서 열린 '인클루시브 디자인 챌린지'의 가이드라인은 다음과 같다. 인클루시브 디자인 컨셉트에 익숙한 영국 디자이너를 중심으로 다양한 분야의 디자이너들이 팀을 꾸린다. 이들은 청각, 시각, 지체 장애를 가진 장애인의 조언을 얻어 48시간 동안 새로운 디자인 아이디어를 도출해 낸다.

"소통이 모든 것입니다Communication is everything." 줄리아 카심 수석연구원은 이 과정에서 장애인들의 역할이 단지 보조적인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장애인들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 디자인을 극복해온 노하우 자체가 매우 훌륭한 디자인 아이디어라는 것이다. 이들의 '조언'은 모두를 위한 혁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

"디자인 역사에서 혁신은 언제나 배제된 사람을 위한 극단적 시나리오로부터 출발했습니다. 타자기를 예로 들어볼까요? 타자기는 이탈리아의 한 발명가가 시각장애인 친구가 편지를 쓸 수 있도록 고안해낸 것입니다. 이처럼 장애인과 노인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일반인에게도 도움이 됩니다."

인터뷰

작년 줄리아 카심 헬렌함린센터 수석 연구원은 사라예보의 디자이너들에게 S.O.S 요청을 받았다. 전쟁의 역사가 긴 탓에 장애인이 많은 이곳에서 청각장애가 더 이상 법적 장애로 구분되지 않으면서 청각장애인들의 생활이 곤란해졌다는 것이었다.

줄리아 카심 연구원은 디자이너들과 함께 사라예보의 상황을 살피러 갔다. 방문한 몇몇 공장에서 상당한 숫자의 청각장애인들이 일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숙련공이었지만, 그들이 만들어내는 제품은 디자인적 요소가 없어 낮은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었다.

줄리아 카심 연구원은 그들의 제품의 가치를 높여 자생력을 길러주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지역 디자이너들을 연계해 청각장애인들이 디자인적 사고와 기술을 습득하도록 했다. 이 과정이 바로 인클루시브 디자인의 핵심이다. 사회적 소통의 방식을 바꿈으로써 자연스럽게 공공적 디자인이 도출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헬렌함린센터는 기업과 지역 사회, 디자이너와 소수자들을 매개하는 프로젝트를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지난 9일 줄리아 카심 연구원을 만났다.

- 인클루시브 디자인은 공공성과 실용성을 잘 접목한 개념 같다.

공공성도 중요하지만 제품으로 시판되어 최대한 많은 사람이 이용할 수 있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요즘은 기업 중에도 '인클루시브 디자인 챌린지' 같은 과정을 도입하려는 곳이 많다. 전세계 많은 기업들에 컨설팅을 해줬다. 내부 디자인팀을 자극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판단하는 것 같다.

- '인클루시브 디자인 챌린지'의 주요 목적은?

디자이너 교육이다. 젊은 디자이너들은 대부분 노인이나 장애인을 위한 디자인이란 지루하고 어렵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협업을 통해 그런 선입견을 깰 수 있다. 노인, 장애인과의 소통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 영국의 시민사회문화가 인클루시브 디자인의 배경이 되었다고 설명했다. 한국에도 그런 가능성이 있을까?

한국에는 나이 든 사람들을 존경하는 전통이 있지 않나. 노인을 위한 디자인에 좋은 동기가 될 것 같다.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