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성과 여성성 동일시… TV 등 새 매체 반복 재생 위해 탄생

최다 연작 공포영화물인 '13일의 금요일'과 '나이트메어'는 공통점이 있다. 두 영화에 등장하는 두 괴물인 제이슨과 프레디는 매 편 죽음을 당하지만 다시 부활하여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들은 주인공에 의해서 매번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하지만 마치 불사조처럼 부활한다. 말하자면 반복된 귀환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죽음과 부활의 과정이 반복된다는 것은 결국 제대로 죽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프레디와 제이슨을 완전히 매장하였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생매장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다시 부활하는 것이다.

지젝에 따르면 이러한 반복은 인간이 매장하고 싶은 실재적 충동이 불현듯 반복적으로 튀어나오는 것과도 같다. 사람들은 엄격한 규범과 내면화된 자아의 통제를 통해서 실재적 충동을 억압한다.

자신의 밑바닥에 숨겨둔 실재적 충동이 튀어나올 경우 그것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수치스러울 수 있기 때문이다. 평소 사회적 규범에 잘 길들여진 사람일수록 이성의 권능에 의존하여 그러한 실재적 충동을 잘 억압한다. 이렇게 보자면 남성보다는 여성이 훨씬 더 실재적 충동을 훨씬 더 깊은 곳에 묻어둠으로써 그것의 귀환을 잘 막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3일의 금요일>
'앙코르'(encore)라는 제목이 붙은 라캉의 세미나는 정신분석학의 관점에서 여성의 문제를 접근한 것으로써 페미니즘 이론가들의 관심을 끈다. '다시 한 번'이라는 반복의 의미를 지닌 '앙코르'라는 제목 자체가 여성의 반복성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라캉은 반복성을 여성성의 특징으로 보았다. 여성은 항상 반복적으로 남성에게 갈구한다. '사랑한다고 말해줘요'라고. 그 말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그러한 반복에는 처음부터 시작이 없었듯이 끝도 존재하지 않는다.

반복성과 여성성을 동일시하는 이러한 논리는 얼핏 여성을 비하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반복성은 결코 열등함과 종속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여성의 반복성은 애초에 팔루스(다소 상징적인 의미로서의 남성 성기)를 결여한 데서 비롯된다. 아버지의 팔루스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데서 남성이 탄생하는데 반해, 여성은 팔루스의 결여를 인정한다.

남성이 자기완결적이고 이론적이며 배타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동일성의 논리를 내세우는데 반해, 여성은 처음부터 완결성을 배제한 미완성을 인정하며 자신의 결여를 채울 타자 자체를 인정한다. 말하자면 여성은 배타적인 자기완결적 논리를 결여한다.

앤디 워홀, 'Beauty No 2' (1965)
여성에게 나타나는 반복은 매번 자신과 똑같은 것만을 강요하는 동일한 것의 반복과는 다르다. 남성의 자기중심적이고도 완결적인 팔루스의 구조는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구분은 바로크 음악과 고전주의 음악에도 적용될 수 있다. 바로크 음악은 고전주의 음악과 비교하여 매우 불안정한 구조를 지닌다. 고전주의 음악의 소나타 형식과 달리 바로크 음악의 구조는 장황하며 산만하기까지 하다.

바로크 음악의 특징을 나타내는 '통주저음'(basso continuo)은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통주저음이란 오늘날 록음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베이스 기타의 연주처럼 곡 전체를 통괄하여 연주되는 저음부를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록음악의 연주에서 계속 반복되는 저음부의 베이스음을 듣지 못하듯이 바로크 음악의 저음부는 다른 성부에 가려져 있다. 하지만 바로크 음악에서 베이스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니 시작도 끝도 없이 마치 심장의 박동처럼 계속 반복된다. 그것은 자기완결적인 구조와는 전혀 무관하며, 처음과 끝이라는 서사적 구조에 반한다.

고전주의 음악은 이러한 통주저음을 폐지하였다. 그것은 완전한 기승전결의 서사적 통합구조를 방해하는 산만한 요소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대신 고전주의 음악은 소나타 형식이라는 간결하지만 매우 형식적이고도 자기완결적인 체계를 완성하였다.

<나이트메어>
장조로 진행되는 남성적인 제1주제와 단조 분위기의 제2주제가 반복되다가 궁극적으로는 제1주제로 통합되는 소나타의 서사적인 형식은 지극히 완성도가 높은 매우 폐쇄적인 형식이다.

거기다가 멜로디가 전개되는 하나의 성부가 중심이 되고 나머지의 성부는 그것을 받쳐주는 형식의 호모포니(homophony) 음악이 완성되는 것도 고전주의 음악을 통해서이다.

말하자면 고전주의 음악은 엄격한 규율에 의해서 서사에 통합되지 않는 어떤 타자도 배제하고 단순한 반복성도 배제하는 음악인 셈이다. 고전주의 음악에서 남성의 팔루스가 청각적으로 울려퍼지고 있음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고전주의 음악에서는 절대적인 형식과 거부할 수 없는 보편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연주되고 있는 것이다.

뉴미디어는 이러한 보편의 목소리를 제거하였다. 왜냐하면 텔레비전, 컴퓨터, 라디오, 비디오 등과 같은 새로운 매체는 마치 바로크의 통주저음처럼 시도 때도 없이 반복적으로 재생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복은 마치 처음부터 '사랑한다고 말해줘요'라고 끊임없이 반복하는 앙코르와도 같다.

그것은 결국 거슬러 올라가면 어떤 절대적이고도 초월적인 그 무엇, 혹은 진실이 있을 것이라는 원본에 대한 믿음을 배신한다. 원래 뉴미디어는 반복과 재생을 목적으로 탄생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진은 영상의 저장을 통하여 영상을 반복적으로 재생할 수 있게 하였다.

축음기는 소리의 저장을 통하여 소리를 반복적으로 재생할 수 있게 하였다. 라디오와 텔레비전은 이러한 반복된 영상과 소리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영화의 경우 얼핏 그것이 단순한 반복보다는 서사적이고도 자기완결적인 텍스트의 구조를 재현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할리우드 영화를 비롯한 소위 주류 영화는 분명히 그러한 경향이 있다. 하지만 앤디 워홀의 초기 실험영화들은 뉴미디어의 반복적이고도 탈사서적인 특성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자신의 부인을 낯선 남자와 침대에 머물게 하여 다소 지루한 일상의 한 장면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뷰티 2번'(Beauty No2, 1965)은 비상업적인 16밀리 카메라로 촬영한 것이다.

자신의 부인과 낯선 남자가 반나체로 한 침대에서 뒹굴고 있다는 설정 자체가 이미 파격적이기도 하다. 만약 서사적인 줄거리를 지닌 영화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갈등이 발생하고 그 갈등이 해결되는 과정으로 마무리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기대감은 통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루한 과정이 반복되고 같은 장면을 반복하거나 클로즈업하며, 실제 시간보다 늘려서 상영한다. 특정한 내용이 아닌 미디어 자체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박영욱 숙명여대 교양교육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