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치ㆍ퍼포먼스ㆍ비디오 등 현대미술 전방위적 탐색하며 시대에 대응

오프닝 퍼포먼스인 성능경 작가의 '신문읽기'
노신사 한 분이 신문을 펼쳐 든다. "안보-경제는 이념 혼재, 사회 이슈는 나이들수록 보수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읽더니 면도칼로 기사를 슥슥 오려 버린다.

사건사고 기사도, 부고 기사도, 아파트 분양 광고에도 가차 없이 칼을 댄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유용한 것인가, 그것은 누가 정했고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런 질문을 담은 칼놀림이 계속된다. 신문은 어느새 너덜너덜해졌다.

지난 12월23일 경기도미술관에서 성능경 작가가 선보인 '신문읽기' 퍼포먼스다. 언론과 권력의 진실성을 겨냥한 이 퍼포먼스는 70년대 언론탄압 정국에 처음 했던 것이다. 전시장에는 당시 성능경 작가가 난도질한 신문들이 빛바랜 채 걸려 있다. 사회 현실과 예술 사이에서 분투한 흔적이다.

성능경 작가의 퍼포먼스로 <1970~80년대 한국의 역사적 개념미술: 팔방미인> 전이 시작됐다. 암울했던 시대를 온몸으로 통과한 예술의 역사를 되살리는 전시다.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의 선구자들

곽덕준, '대통령과 곽' 중 '카터와 곽', 1977
이번 전시에서는 8명의 작가들이 재조명된다. 곽덕준, 김구림, 김용익, 박현기, 성능경, 이강소, 이건용, 홍명섭이다. 이들은 창작자이자 이론가, 행동으로 개념을 실천한 활동가로서 70~80년대 한국미술사에 한 획을 그었다.

설치, 퍼포먼스, 비디오, 대지미술, 과정미술 등 현대미술의 범주를 전방위적으로 탐색하며 시대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전시의 부제인 '팔방미인'은 말 그대로 '여러 방면에 능통한 사람'이라는 뜻과 '8명의 아방가르드 미술인'이라는 뜻을 동시에 갖고 있다.

이들의 작업은 현재의 한국미술이 활발하게 고민하는 문제, 사회 현실과 미술의 관계에 대한 실마리다. 미학적 가치보다 정치적 의도가 앞섰다고 평가받는 80년대 민중미술 이전에 두 마리 토끼를 고루 잡으려는 시도였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사회는 급격하게 근대화되고 있었다. 생활양식의 변화와 가치관의 혼란은 작가들을 문명에 대한 성찰과 실존적 고민으로 이끌었다. 전시장 벽면에 적힌 작가들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이를 대변한다.

"사실상 나는 메카닉하고 거대한 현대사회를 살면서 원시부족사회를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이건용 작가)

김구림, '24분의 1초의 의미', 1969
"풍화되어 소멸하든가, 또는 룰을 명확하게 해서 인간의 주체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늘 자기 주장을 필요로 하든가, 그 어느 쪽의 길을 선택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곽덕준 작가) "현기증 나도록 산뜻하고도 나긋나긋할 뿐인 현재가 우리의 모든 것인 양 여겨지는 현실로부터 그 현실을 제거하기를."(성능경 작가)

그 결과 동양 사상이나 민속을 재해석해 접목시키는 작업도 많았다.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정의도 새롭게 내려졌다. 김용익 작가는 "70~80년대에 이르러 비로소 예술가가 자신의 예술에 거리를 두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움직임이 생겼다"고 말했다.

작가 개개인의 고민은 'S.T(space & time) 그룹'이라는 단체 행동으로 구체화되었다. 70년대 이전 한국미술에 논리와 분석이 결여되어 있다는 문제 의식을 공유한 작가들은 미술 이론을 공부하고 담론을 만들기 위해 모였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이런 역사가 현재 한국미술의 건강한 근간임을 밝히는 것이 <1970~80년대 한국의 역사적 개념미술: 팔방미인> 전의 의의다.

이번 전시에는 경기도미술관이 소장한 작품뿐 아니라, 퍼포먼스와 한 번 전시된 후 소실된 작품까지 재현되어 선보인다. 작업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아카이브도 함께 마련된다.

김용익, '스프레이작업 바리에이션', 1974
시대와 문명, 관습에 대한 저항들

전시장 입구에서 관객을 맞는 것은 쌓여 있는 김용익 작가의 종이상자들이다. 1981년 '청년작가전에', '오늘의 상황전에', '금호미술관에' 보내진 이 작품들은 작가들이 특정 소재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며 스스로 물신화했던 당시 미술계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김현정 학예연구사는 김용익 작가의 작품이 "삶과 예술이 분리된 공간에서 권력화되어가는 모더니즘의 인습과 관행에 저항했다"고 설명했다. 벽면에는 작가가 만들어낸 환영이 걸려 있다.

1974년 작인 '스프레이 작업 바리에이션'은 언뜻 주름져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 편평하다. 주름 잡은 천에 스프레이를 뿌려 그 형태를 남긴 후 펴둔 것. 우리의 지각을 혼란하게 함으로써 서구적 근대의 시각중심주의에 의문을 제기한 작품이다.

바닥에는 홍명섭 작가의 1987년 작 'de·veloping; level casting'이 깔려 있다. 원고지 문양의 거대한 고무판이다. 홍명섭 작가는 초원과 사막, 강물과 바닷물 등 자연환경에 원고지 형태로 실, 천 등을 띄우는 작업을 했다.

박현기, 'TV시소'. 1984
김종길 학예연구사는 이런 작업을 만다라에 비유했다. 작가가 지향한 예술은 자연환경과 수평을 향한 의지 그 자체였다는 것이다.

성능경 작가의 작업 중에는 신문을 모티프로 한 것이 많다. 신문의 보도사진을 확대해 벽면 가득 붙이고 사건 현장을 표시하는 기호들을 덧붙인 '현장 37', 70년대 신문에서 발췌한 인물 사진들을 일일이 눈 가린 채 배열해 놓은 '특정인과 관련 없음' 등은 신문으로 대표되는 언론, 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담론을 유희적으로 비튼 작품이다. 70~80년대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해 보면 더욱 용감하게 느껴진다.

이건용 작가는 전시 오프닝 때 '달팽이 걸음' 퍼포먼스를 했다. 미술관 복도에 쭈그려 앉은 채 앞을 분필로 칠하면서 발을 끌고 나아가는 퍼포먼스였다. 그 육체 노동의 속도와 흔적은 곧 기계문명의 대척점처럼 보였다. 이건용 작가 작업의 특징은 신체를 매개로 한다는 점이다.

그가 온몸으로 그려낸 회화 작품들을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다. 또 1973년 파리비엔날레에 출품했던 작품 '신체항'도 새롭게 설치되었다.

박현기 작가와 이강소 작가의 작품들은 동양적 감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박현기 작가는 "서구 물질문명의 표상이자 기술의 총화인 비디오를 자연친화적이고, 명상적이고, 정신적인 매체로 전환"(김홍희 경기도미술관장)시켰다.

이강소, '뱀부', 1972
'TV 어항'에서는 물고기가 헤엄치는 화면으로 채워져 있다. 'TV & Stone'은 돌 무더기 속에 돌을 찍은 영상이 나오는 TV를 끼워둔 작품. 실제 돌도, 돌의 이미지도 돌이라고 부르는 우리의 언어적, 지각적 관습을 돌아보게 만든다. 시소의 양 옆에는 돌과, 돌 화면 TV가 올라 앉아 있다.

전시장 한쪽에 세워진 갈대밭은 이강소 작가의 1971년 작 'Reed'. 작가 자신이 영감을 받은 장소를 관객도 체험할 수 있도록 재현해 놓았다.

곽덕준 작가와 김구림 작가의 작업은 재기발랄하다. 재일 한국인 2세인 곽덕준 작가는 타자로서의 정체성을 작업에 녹여냈다. 작가 자신을 투영한 작품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그중 '대통령과 곽'은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유머러스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 보여준 작품. 1974년부터 2000년까지 타임지 표지에 실린 미국 대통령의 얼굴과 작가 자신의 얼굴을 반반씩 붙여 만든 초상사진 연작이다.

김구림 작가의 작업은 지금 봐도 신선하다. 황록주 학예연구사는 "김구림 작가는 미술사를 넘어 우리 문화사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한다.

홍명섭, '디-벨로핑(레벨 캐스팅)', 1987~2004
강둑을 일정한 모양으로 불태워 그 변화 양상을 보여줬던 한국 최초의 대지미술 작업 '현상에서 흔적으로', 한국 최초의 실험영화 '24분의 1초의 의미', 지문이 찍힌 종이를 봉투에 넣어 발송했던 메일 아트 '매스미디어의 유물' 등이 대표적 예다. 이번 전시에서는 일상적 사물을 오브제로 삼아 그 쓰임과 자리를 뒤집은 작품들도 만날 수 있다.

김구림 작가가 1969년 '24분의 1초의 의미'를 만든 사연은 이 한국 아방가르드미술의 선구자들이 겪은 고초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영상 작업이 미술의 한 영역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때다.

김구림 작가가 영화를 찍는다는 소문이 돌자 영화계가 발끈했다. 충무로에 나갔다가 몰매를 맞기도 했다. 촬영을 몰래 하는 것은 물론, 편집을 맡길 데가 없어 작가 스스로 기술을 배워야 했다.

오프닝 퍼포먼스 때 성능경 작가는 "인생은 어렵고 예술은 쉽다"고 외쳤지만 <1970~80년대 한국의 역사적 개념미술: 팔방미인> 전을 보면 인생도 어렵고 예술도 어렵다. 다만 아무리 어려워도 진지하게 맞서고, 쉬운 듯 눙치고 뒤집어 보이는 것이 진짜 고단수임을 알게 된다. 인생에서든 예술에서든.

전시는 내년 3월20일까지 경기도 안산시에 위치한 경기도미술관에서 열린다. 2월에는 관련 세미나가 마련될 예정이다. 031-481-7000.

오프닝 퍼포먼스인 이건용 작가의 '달팽이 걸음'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