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백ㆍ손흥규 단편… 자본 앞에 무력한 농촌의 현실 그려

피카소의 '게르니카',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로버트 카파의 '어느 공화국 병사의 죽음'. 이 세 작품은 스페인 내전을 다룬 3대 걸작으로 알려져 있다. 위대한 작품에는 인간의 희로애락, 인류사의 흔적이 투영된다.

이렇듯 문화예술은 사회와 동떨어져 호흡할 수 없다. 주간한국은 우리 사회의 이슈를 (과거나 현재에) 소재로 삼은 문화예술작품을 소개하며, 작가의 생각과 시선을 들여다보는 기획물 '이슈&작품'을 연재한다.

'그렇게 할 거 다~ 하고, 볼 거 다~ 보면 소는 누가 키울거야? 소는!'

'두 분 토론'의 박영진 위원 목소리가 귓가에 왕왕거린다. 정부가 구제역 발생 한 달 만에 위기 경보 수준을 최고 단계인 '심각'으로 격상했다. 발굽이 2개인 소, 돼지에게 생기는 제1종 바이러스성 법정전염병, 구제역. 치사율은 50%를 넘는데 특별한 치료법은 없다고 한다. 방역에 철저할 수밖에. 자식처럼 키운 놈을 살처분할 수밖에.

살면서 '선한 의도가 선한 결과'를 담보하지 않는 경우가 어디 한 둘이겠냐만은 정부 대처를 보면 애초에 선한 의도는 있던 건지 의심하게 된다. 이런 저런 핑계로 늑장대처한 정부가 '국가차원의 총력'을 선언했다는데, 핵심은 소 키우는 농부들에게 구제역 책임을 돌리는 데 있다.

축산업 허가제 도입, 축사 출입자에 대한 소독과 기록 의무화, 외국인 근로자의 신고·교육·소독 의무화. 여기다 질병 발생원인 제공 때는 농장폐쇄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했다.

요컨대 신고와 소독을 제대로 안 하면 보상금을 삭감하고, 벌금을 매기고, 실형을 부과하겠다는 것이다. '국가차원의 총력'을 펼칠 때 정부는 검사와 처벌 말고, 뭘 하겠다는 걸까? 도대체 우리 세금을 어디에다 쓰는 걸까? 이쯤 되면 '소는 누가 키울 거야?'는 유행어가 아니라 절박한 구호로 다가온다.

그러니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같은 농촌풍경은 저 근대의 문이 열리던 때, 고향 그리기 노래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최근 문학작품의 9할은 도시를 배경으로 쓰이지만, 몇몇 작가들은 여전히 농촌현실을 밑천 삼아 이야기를 펼친다. 물론 이들의 농촌은 정지용의 아름다운 고향과는 다른 모양새다.

이들에게 농촌은 산업화 이전 전통적인 삶과 자본주의 역풍을 감내는 복합적 공간이다. 지난해 발간된 이시백의 단편집 <갈보콩>. '이문구를 이은 농촌작가'란 타이틀답게, 수록된 작품 11편 모두 농촌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당연히 소 얘기도 나온다.

단편 '워낭소리'는 젖소를 키우는 만철이 사료값과 품삯이 올라 키울 수 없어 우시장에서 갔지만 낮은 가격 때문에 팔지 않고 돌아오는 이야기다. '부조(扶助)'는 조부 때부터 이웃에 살고 있는 명근과 을성이 한미 FTA체결로 인한 육우값, 소고기값 등락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며, 티격태격하는 삶을 그린 단편이다.

손홍규의 단편 '봉섭이 가라사대' 역시 소로 점철된 비루한 농촌현실을 그린 소설. 봉섭의 아버지 응삼은 소싸움꾼 겸 소장수로, 평생을 소와 함께 한 나머지 얼굴마저 소를 닮아버렸다.

소처럼 순박하게 살아왔지만 약육강식의 사회 앞에서 무력한 응삼의 모습은 '선한 의도가 선한 결과를 담보하지 않는' 삶의 전형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자본주의 시스템 그 대척점에 봉섭의 아버지 응삼이 있다.

세계화시대에 정치는 국가 단위를 넘어서고, 그 책임은 오롯이 개인에게 전가된다는 68세대 서구 철학자의 말은, 이제 한국의 농촌에도 적용되기 시작했다. 가치의 권위적 배분. 한국사회에서 정치는 여전히 국가의 권한이지만(권위적이긴 한 걸까?), 그 책임은 오롯이 개인의 몫으로 전가된다.

이렇게 허가제로 바꾸고, 죄인처럼 검사하고, 벌금 때리고, 시장까지 개방하면, 도대체 소는 누가 키울거야? 소는!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