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령대는 세분화, 전문 극단ㆍ공연장 힘입어 전반적 수준 향상
# 하얀 눈을 뭉쳐 바닥에 굴리던 소년이 무대 옆으로 사라졌다. 다시 등장한 소년은 더 큰 눈덩이를 굴리는 중이다. 다시 무대 옆으로 사라진 소년이 등장하자 거대한 눈덩이가 뭉쳐져 있다. 대여섯 살이 안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까르르 웃는다. 이어 거대한 스노우맨이 움직이고 소년과 함께 밤새 여행을 하는 동안 아이들은 무대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각각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와 호암아트홀에서 공연 중인 <베니스의 상인>과 <스노우 맨> 객석의 표정이다.
겨울방학이 되면서 공연장마다 어린이 공연이 속속 올려지고 있다.
예전이라면 TV 속 인기 캐릭터나 '착한 어린이 만들기 프로젝트' 인 양 교훈적이고 권선징악적인 줄거리가 대부분이었던 방학 무대. 몇 년 사이 어린이 공연이 달라지고 있다.
줄거리뿐 아니라 무대미술이나 의상 역시 시대를 충실히 재현하거나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시도한 흔적이 역력하다. 자연히 아이들의 호응이 좋을 수밖에 없다. 아이들의 '보호자' 역할로 동행했던 부모들 역시 과거의 수고로움이 관람의 즐거움으로 바뀌었다.
최근의 어린이 공연은 아동 연령대의 세분화가 이루어지는 한편, 아동만을 수용했던 아동극에서 벗어나 아이와 어른이 모두 관람할 수 있는 '가족극'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아동극의 전반적인 수준 향상은 아동 청소년 연극을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뛰다', '북새통'과 같은 전문 극단과 사다리 아트센터와 같이 어린이 전문 공연장의 출현이 하나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어린이'로 두루뭉술하게 칭해지던 관객의 나이가 분명하게 제시되면서 최근에는 0-3세를 위한 베이비 드라마가 상륙하기도 했다.
"아동들은 그들의 크기에 관계없이 나름대로 치열한 인생을 산다. 그들은 분노, 두려움, 행복, 슬픔, 외로움, 놀라움의 감정을 안다. 이는 순간적이고 하찮은 것으로 치부되지만 어른의 감성이 아이의 감성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어린 시절, 심지어 2-3살 때의 일을 기억하는 것은 당시 느꼈던 감정이 성인이 된 지금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어린이 공연 창작자들이 종종 범하는 오류에 대한 예리한 지적이다.
서울시극단이 지난해부터 시작한 '어린이 셰익스피어 시리즈'의 두 번째 무대를 연출한 김광보 연출가. 그는 3시간짜리 <베니스의 상인>을 1시간 15분으로 압축했다.
스토리 텔링과 인물 간의 관계만 명확하다면 아이들이 충분히 이해할 거라는 연출가의 예상대로 아이들은 공연에 시종일관 집중했다. 텍스트에 충실하면서, 유태인 샤일록이 탐욕과 악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것을 경계했다.
일찍이 어린이 공연을 자체 제작해 '어린이무대 시리즈'로 레퍼토리화해온 극단 학전. 연출가 김민기가 이끄는 학전은 지금껏 <무적의 삼총사>, <고추장 떡볶이>, <우리는 친구다>, <슈퍼맨처럼>, <그림자 소동>, <빠삐에 친구:잃어버린 글씨>, <진구는 게임 중> 등 다수의 어린이 공연을 연극과 뮤지컬로 제작해왔다.
한국 아이들의 실감나는 일상과 생생한 라이브 연주로 이미 스테디 셀러로 자리 잡은 공연도 다수. 2008년 대한민국연극 대상 아동청소년연극상, 서울어린이연극상 우수작품상 등을 수상한 <고추장 떡볶이>가 새해 첫날 공연을 시작한다. 5세~10세 아이들이 특히 좋아한다.
17년간 영국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던 <스노우맨>은 세계 최초로 라이선스로 한국 무대에 올랐다. 신비롭게 눈이 내리는 겨울밤, 눈사람과 소년의 우정은 말이 없어도(무언극) 뭉클하게 객석까지 전달된다.
동화책과 애니메이션을 통해 이미 <스노우맨>을 접해온 미취학 아동들이 동화책을 가지고 공연장을 찾은 모습이 눈에 띄었다.
아빠와 두 아이가 하늘을 나는 플라잉 장면이 확대된 올해의 공연은 1월 8일,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막이 오른다.
어린이를 위한 오페라 무대도 올라간다. 2001년부터 9년간 <마술피리>를 대표 가족 오페라 레퍼토리로 공연한 예술의전당은 지난해부터 <투란도트>로 프로그램을 바꿔 매년 여름 공연한다.
예술의전당 가족 오페라가 취학 아동 이상을 대상으로 한다면, 올 겨울 대학로에서 공연하는 <세빌리아의 이발사>는 만 6세 이하의 아동을 대상으로 한다.
'체험하는 어린이 오페라' 콘셉트로 기획된 어린이 오페라는 2시간짜리 공연을 40분으로 축약했다. 여기에 공연 전후를, 각각 오페라에 대한 설명과 오페라 발성법, 인사법을 배우는 시간으로 꾸몄다.
모차르트, 바흐, 베토벤, 차이콥스키 등 천재 작곡가들의 작품을 7개의 관악기 캐릭터(트롬본, 튜바, 바순, 호른 등)가 등장해 아이들에게 클래식 음악과의 친근한 만남을 주선한다.
서울 아시테지 겨울축제
1960년대 프랑스에서 태동한 아시테지(국제아동청소년연극협회)는 1992년 한국에 들어왔다. 초기에는 매년 여름, 6년 전부터는 여름과 겨울 두 차례 열리며 국내외 아동극에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해오고 있다.
관객들의 반응도 뜨겁다. 축제 초기부터 초대권 없는 공연을 고수하고 있지만 매번 전석 매진에 가까운 객석 점유율을 보인다.
공연 못지않게 재미있는 부대행사는 예총화랑, 꼭두박물관, 마로니에공원과 예술인의 집 등 대학로 일대에서 열린다. 축제란 이름에 걸맞게 하루 종일 공연 3편을 보면서 휴식시간 동안 부대행사를 즐기는 이들이 많다.
이번 겨울 축제에는 연령대의 세분화가 눈에 띈다. 3세 이상, 3세부터 6세까지 등 공연마다 관람 연령대를 세분화해서 표기한 점이나 미취학 아동뿐 아니라 초등학생과 청소년까지 관람할 수 있는 공연으로 프로그램을 짰다. 덕분에 인형극부터 온전히 영상만을 이용한 공연까지 표현의 방식도 다채롭다.
겨울축제의 공식개막작은 <왜 와이마 왜? - 호기심을 따라 떠나는 와이마의 모험>. 3년째 진행하는 아시테지 국제 레지던시 프로그램 참가자들의 공동작품이다. 일본, 스리랑카, 대만, 중국, 한국 등 5개국의 총 7명의 참가자는 3개월 동안 '평화'를 주제로 흥미진진한 모험 이야기를 완성했다.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아시아 아동청소년 공연예술을 위한 네트워크를 구축을 위해 (사)국제아동청소년연극협회가 주최하는 국제 교류 사업.
아시테지 한국지부의 이사장인 김병호 예술감독은 "5년 차에는 기존의 멤버 중 왕성하게 활동하는 이들을 선발해 프로그램을 할 예정이다. 당장은 예산이 소요되더라도 10년쯤 되면 이들의 역할이 커질 것"이라고 국제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여름과 겨울마다 축제가 열리는 서울 아시테지 축제는 이 둘을 차츰 차별화할 예정이다. 여름에는 예술축제에 초점을 맞추고, 겨울에는 공연을 유통하는 마켓의 기능을 하는 축제로 방향을 잡아가고 있다.
이번 서울 아시테지 겨울축제 공연에 대한 문의는 T. 02- 745-5863, www. assitejkorea.org
한편, 국내 창작극과 해외의 작품을 국내에 주로 소개해왔던 아시테지는 2008년 호주 애들레이드에서 열리는 제17차 아시테지 세계 총회 및 아동극 축제에 국내 아동극단의 작품 두 편을 초청받는 경사를 누리기도 했다.
이는 국내의 아동극이 점점 탄탄해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