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아트프리즘/디지털 콜라주] 자유로운 '컷 앤 페이스트' 표현에 범위 넓혀… 콜라주 특성과 상통

파블로 피카소, '바이올린', 1912
피카소의 큐비즘으로 우리에게 익히 알려져 있는 시기는 주로 '분석적 큐비즘'이라고 불리는 시기이다.

거의 큐비즘과 동일시하는 이 분석적 시기의 특징은 대상을 무수히 작은 단면들로 분할하여 그것을 하나의 평면에 펼쳐놓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피카소는 전통적인 회화의 관행인 배경과 형상의 이분법을 넘어서려 하였다.

형상과 구분되는 배경에 형상을 그린 것은 그림을 실재세계의 재현물로 취급하는 관행과 연결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카소는 대상을 세밀하게 쪼개면 쪼갤수록 화면자체가 하나의 단일한 평면이 되어버려서 사물자체가 아예 소멸되어 버리는 위기를 느꼈다. 대상을 무수히 많은 단면들로 쪼개고 분석(분할)한 결과이다.

피카소가 이러한 위기의식은 분석적 큐비즘의 포기와 더불어 새로운 작업방식의 등장을 낳게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종합적 큐비즘'이다. 종합적 큐비즘은 말 그대로 분석적 큐비즘과는 대비되는 듯 보인다.

강홍구, '오쇠리풍경6', 2004
종합적 큐비즘의 핵심은 콜라주이다. 말 그대로 짜깁기 형태의 종합인 콜라주는 하나의 전체적인 대상을 창출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대상을 해체시키는 분석적인 큐비즘의 방법과는 정반대로 해체된 부분들을 하나의 통합물로 종합하여 새로운 대상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새로운 하나의 총체적 대상을 만들어내는 것은 결코 큐비즘이 원하는 방식이 아니다. 피카소가 행한 콜라주는 스케치된 그림 위에다가 잡지나 신문지 등에서 오려낸 종이조작을 붙이는 제작방식이었다.

콜라주라는 말 자체가 암시하는 것처럼 콜라주란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고 맥락에서 잘려져 나온 파편들을 모아서 하나의 통합적인 대상으로 만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피카소가 의도한 바는 아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의 고정되고 완결된 대상을 피하고자 하였다. 그것은 곧 어떤 객관적 대상을 재현하는 것으로서 또 다시 전통적인 관행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재현주의의 관행은 그가 철저하게 피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피카소의 관심은 콜라주를 통해서 어떤 새로운 대상을 만들기보다는 여전히 하나의 총체적 대상을 교란하고 방해하는 파편화의 전략과 관계된 것이었다.

콜라주는 어떤 재현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교란하고 피하는 방식이다. 가령 1912년 작품 '바이올린'에서 그는 바이올린의 스케치 몸통과 배경부분에 신문지에서 오린 부분을 붙여 놓는다.

바이올린의 몸통 부분에 있는 신문지는 바이올린 몸통의 표면에 밀착되어 그것을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느낌은 곧 소멸하고 만다. 그 신문지는 배경부분의 신문지와 호응함으로써 대상(형상)의 표면과 배경의 표면에 대한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신문지는 목탄드로잉이 표현하고 있는 바이올린과는 어긋나는 것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오히려 대상의 통일성을 교묘하게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피카소는 콜라주를 대상의 재현이나 통합이 아닌 파편화의 전략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신문지나 잡지를 활용한 것도 이러한 전략의 산물이다.

통속적인 신문지나 잡지는 대상의 예술적 재현이라는 고급스러운 관행을 위반한다. 또한 아무렇게나 잘라낸 신문의 기사들은 이전에는 하나의 완결된 서사구조를 가지고 세계를 진실하게 재현하는 것으로 신성한 담론을 담고 있었다. 자본주의 사회는 이러한 완전한 서사와 재현을 요구한다. 콜라주는 오히려 이러한 서사와 재현을 파편화한다.

이러한 파편화의 전략은 단순한 파괴가 아니다. 파편들 속에는 매우 분산적이고도 단편적인 진실들을 담고 있다. 그러한 단면들이 거대한 서사로 통합되어 하나의 완결된 대상으로 재현되는 것을 방해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콜라주는 그 자체가 분열증적일 수밖에 없다.

흥미롭게도 디지털 예술은 태생적으로 이러한 콜라주의 파편화 경향과 분열증적인 증세를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디지털 그래픽이나 디지털 워드작업 혹은 디지털 음악작업은 언제나 복사해서 오려내고 다시 붙이는, 이른바 '컷 앤 페이스트'(cut and paste)의 과정을 포함한다.

직접 종이에 펜으로 글을 쓰던 시대나 타자기로 타이핑하던 시절에는 상상도 못하였던 복사와 오려붙이기가 일반적인 글쓰기의 관행이 되었다. 이는 모두 디지털 기술의 덕택이다.

이러한 '컷 앤 페이스트'의 행위는 디지털 사진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불과 십여 년 전만 하더라도 디지털 사진을 거부하던 사진작가들의 대부분이 디지털 사진기를 채택하게 된 것은 그저 디지털 사진이 대세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또는 디지털 사진기가 아날로그 사진기보다 훨씬 더 선명하거나 저장이 용이하기 때문이 아니다. 디지털 사진은 '컷 앤 페이스트'가 자유롭기 때문에 표현의 범위가 매우 넓어진다. 따라서 디지털 사진은 현실을 완벽하게 재현하기보다는 분산되고 파편화된 콜라주의 특징을 지닌다.

가령 강홍구의 '오쇠리 풍경'은 이러한 특징을 매우 잘 보여준다. 마치 하나의 파노라마와 같은 이 사진은 하나의 연속된 통합적 대상을 재현하고 있는 듯하다. 김포공항 옆 비행기가 드나드는 폐허의 땅 오쇠리는 자본주의 발전에서 밀려난 씁쓸한 현실을 재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사진은 그러한 믿음을 배반한다. 이 사진은 몇 개의 장면을 '컷 앤 페이스트'한 것이다. 흔히 말하는 몽타주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명백하게 콜라주에 해당된다.

디지털 기술에 의해서 매우 매끈하게 연결된 이 하나의 총체적 대상은 파편적 균열을 결코 감추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진에서 통일된 시점은 존재하지 않으며, 공간적인 연속성도 결여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 사진은 매우 흥미로운 방식으로 디지털 예술의 '컷 앤 페이스트'를 보여주고 있다. 작가 강홍구는 마치 허리우드의 연속편집처럼 꿰맨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고 여러 개의 사진을 봉합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바로 이러한 봉합의 흔적을 남기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여전히 서로 분산된 파편들의 콜라주임을 숨기지 않고 의도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역설은 사진이 현실을 통합적으로 재구성한다는 다큐멘터리 사진의 신화를 비웃는 것이기도 하다. 봉합을 완벽하게 하고 있지만 전통적인 다큐멘터리 사진과 달리 봉합 자체를 숨기지 않는 것이다. 디지털 기술과는 무관하지만 일반렌즈가 아닌 광각렌즈를 사용하여 시각의 범위를 과장하는 것 또한 이러한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강홍구의 작업은 디지털 사진이 태생적으로 콜라주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는 몇 개의 장면들을 뜯어내어 다시 합성함으로써 다큐멘터리가 아니지만 얼핏 다큐멘터리처럼 보이는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다큐멘터리가 하나의 완결된 서사와 의도에서 만들어진 것인 반면, 강홍구의 작업은 그러한 총체적 통일성을 결여한다. 말하자면 그의 사진은 자본주의 사회의 개발논리에 밀려나는 쓸쓸한 폐허 공간으로서의 오쇠리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닌 셈이다.

물론 그러한 오쇠리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이 사진을 하나의 서사 혹은 다큐멘터리에 통합시킬 경우이다. 그의 사진은 파편화된다. 개발과정의 폐허, 작가 개인의 사적 추억, 비행기, 희망, 절망 등 갖가지 파편적인 부분 대상과 충동들이 콜라주처럼 분산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디지털 사진 자체가 지닌 콜라주의 특성인 것일지도 모른다.



박영욱 숙명여대 교양교육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