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로 듣는 한국문화 (4) 소리의 예술

김순기, 우물을 듣다, 2010, 사진 박명래
오래된 우물에서 웬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다가갈수록 엉켜있던 소리들이 제각각 정체를 드러냈다. 버스 지나가는 소리와 인터넷 소리,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와 참새 소리, 달그락 달그락거리는 부엌 소리…. 서울의 삶을 담은 소리들이다.

옛 궁 우물에서 소리의 형편을 헤아리는 일은 묘했다. 나무 소리 사이로 바람이 지나갔고, 부엌 소리 사이로 매미가 울었다. 소리와 함께 우물을 둘러싼 생활들이, 쌓여온 시간들이 함께 웅성거리는 중이었다. 한데 '부어진' 소리들은 역설적으로 이곳이 얼마나 오랫동안 메말라 있었는지 환기시켰다.

<미디어시티서울2010>이 열린 지난해 여름, 김순기 작가가 경희궁지의 한 우물에 설치한 <우물을 듣다>다. 이 한판 소리굿의 연유는 이러하다. "이 우물은 옛적에 시녀들이 물을 길어다가 밥도 짓고 된장 고추장 담어 임금님께 바쳤다던데 지금은 물이 말라 밑이 빠진 항아리가 되었단다.

옛 한양의 풍수지리가 현대도시 계획의 찬바람 타고 수맥이 말라버렸나 보다. 서울의 먼지 소리를 담아, 서울의 공허를 부어 우물의 침묵을 들어 보고자 한다."

세계를 뒤흔든 소리의 전쟁

김기철, 화양, 2010
우리는 시대와 사회의 변화상을 보는 것만큼 듣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소리는 대다수에게 간과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정직하게 시대와 사회를 나르기도 한다. 게다가, 간과되는 데 비해 엄청난 영향력을 갖는다. 무엇보다 인간에게 '귀덮개'가 없기 때문이다. 보기 싫은 장면 앞에서야 눈을 질끈 감아버릴 수 있지만 듣기 싫은 소리 옆에서 귀는 속수무책이다.

캐나다의 언론학자이자 작곡가인 머레이 쉐이퍼의 <사운드 스케이프: 세계의 조율>에서는 세계의 변동 속에서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통제한 소리들이 나온다.

예를 들면, 서구의 전쟁에서 소리는 중요한 군사전략 중 하나였다. 로마의 웅변가인 타키투스는 "전쟁에서는 고함소리를 내야만 한다. 고함소리 그리고 무기 부딪히는 소리가 적의 마음을 더욱 어지럽히기 때문"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교회의 확장에는 종소리가, 근대화에는 규칙적인 시계 소리가 큰 역할을 했다.

산업화 이후 세계를 뒤덮은 것은 기계 소리였다. 오늘날 우리 역시 기계 소리와 함께 산다. 종일 교통수단의 소리, 공사하는 소리에 시달리다 집으로 돌아오면 냉장고 소리와 TV 소리가 기다린다. 알람시계 소리에 깨어나고, 휴대전화 벨소리에는 저절로 반응한다.

매일 보는 풍경, 매일 읽는 글처럼 매일 듣는 소리도 곧 우리가 된다. 다투는 소리를 들으면 사나워지고, 정갈한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깊어진다. 그런데 이렇게 기계 소리만 가득한 세계의 심성은 어떨까. 소리를 주제로 작업하는 이학승 작가는 "인위적 소리가 너무 많이 들린다"고 지적한다. "사람들이 점점 차가워지는 데도 한 몫 하지 않을까요?"

이학송, 보이스 킷 그룹, 2010
도시의 거리는 개발과 소비의 욕망으로 들끓는다. 오래된 건물을 쓰러뜨리고, 골목을 지우는 포클레인 소리는 언제부터 가장 익숙한 소리가 됐다. 술집이나 슈퍼마켓이 새로 생겼다고 동네가 떠나가게 틀어놓는 전자음 소리와 호객 소리도 행인의 귀에 가차 없이 파고든다. 그야말로 소리 전쟁터다. 하지만 이 전쟁은 잘 논의되지 않는다.

이유가 뭘까. 작가 콜렉티브 ps는 웹진 SOUND@MEDIA에 연재한 글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재개발에 대해 보도하는 뉴스에서 파괴되고 있는 현실의 소리를 듣기란 쉽지 않다. 심지어 그 흔한 포클레인 소리도 발견할 수 없다. 이런 소리들은 메시지와 리포트 사이에서 쉽게 증발되어 버린다."

증발된 소리 사이를 탐험하는 소리 예술

소리를 채집하고, 재구성하고, 새로운 맥락에 놓는 예술적 시도들은 증발되어 버린 소리, 기억에만 머물러 있는 소리, 주변을 채우고 있지만 귓등으로 흘러가는 소리들 사이를 탐험한다.

'소리 조각가' 김기철은 소리를 보거나 만질 수 있는 형태로 구현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라디오 야구 중계방송을 들으며 경기장의 모습과 선수들의 움직임을 떠올렸던 '관음'의 경험에서 출발했다. 작업의 주된 재료 중 하나가 자연의 소리다. '화양(華樣)'에서는 종묘에 내리는 빗소리를 담았다.

스피커마다 각각 다른 원근감과 울림의 경로가 있어 관객은 움직임과 위치에 따라 다채로운 빗소리를 들을 수 있다. 어떤 스피커는 인기척이 나야 비로소 반응하고, 어떤 스피커는 우물 모양이라 들여다 들을수록 빨려든다.

마음까지 정돈해주는 이 소리들은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었지만,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다. 그동안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살고 있었을까.

이학승 작가는 '보이스 킷 그룹' 작업에서 거실과 화장실, 안방의 소리들을 발췌해 정리했다. 그리 특별한 소리는 아니다. 거실에서는 홈쇼핑 광고가 요란한 가운데, 먼지 사이로 햇빛이 비쳐든다. 선인장의 꽃봉오리가 터지고 훈증기에서 약이 끓고 있다.

이런 시나리오를 성악가, 일반인, 청각장애인들에게 주고 소리로 번역하도록 했다. 그 결과가 재미있다. 성악가는 모든 소리를 특유의 발성으로 통일하는가 하면, 일반인은 의성어를 이용한다. 햇빛이 흩어지는 소리는 '찌징징', 꽃봉오리가 터지는 소리는 '뻐버벙'이다. 청각장애인은 언어 이전의 소리로 표현한다. 발음이 불분명하고 성대보다 몸통에서 나온다.

이런 결과는 소리를 듣고 내는 것 역시 일종의 사회적 관습임을 증명한다. 캐나다 맥길대학교 조너선 스턴 교수는 <청각의 과거>에서 "감각을 통해 세계와 관계 맺는 능력 자체가 사회적 환경에 따라 다르게 조직되고 학습된다"고 말했다. 마르크스도 "오감의 형성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세계의 역사 전체가 산출한 결과"라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특정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어떤 소리에 일정하게 반응하고, 어떤 소리는 아예 듣지 못하는 '자연스러운' 상태 역시 역사적 현상이다. 반대로 생각해보자면, 우리에게도 언젠가 다르게 듣는 능력이 있었을지 모른다.

확성기의 고함과 유혹적인 허장성세 대신 가지 잘린 나무가 우는 소리, 두꺼운 외투 아래에서 힘차게 뛰고 있는 당신의 심장 소리를 듣는 사람이었을지도.

소리는 어떻게 음악이 되었나

"청각장애인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소리란 귀로만 듣는 게 아니라 피부로 느끼는 것임을 새삼 깨달았어요. 일반인들은 청각장애인들은 소리를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표현해낸 소리는 공기의 진동으로 경험한 것이었거든요."

이학승 작가의 말처럼 소리는 단지 듣는 것도, 머리로 기억하는 것만도 아니다. 온몸으로 부대껴 깨닫는 것이다. 소리를 대하고 다루는 일을 곧 삶과 세계 간 관계를 만드는 일로 읽을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여기에는 어떤 소리를 간직하거나 퍼뜨려야 하는지, 어떤 소리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과 판단이 있다.

지난 1월 13~14일 서울 영등포 하자센터에서는 아이들이 일상의 소리로 음악을 만드는 '소리배낭여행'이 진행됐다. 음악포털사이트 벅스를 운영하는 네오위즈인터넷과 마법나무재단, 공공 교육과 디자인 사업을 하는 사회적 기업 노리단이 함께 진행한 프로그램이다.

아이들은 곳곳에서 재료들을 채집해 왔다. 탁탁탁탁, 칼로 도마 치는 소리, 츠와와왕, 변기 물 내리는 소리, 딸깍딸깍, 문 잠그는 소리, 위이잉, 자 튕기는 소리…. 한바탕 펼쳐진 소리들 사이에서 들린 것은 그 소리를 녹음하기 위해 귀 기울였을 아이들의 마음이었다.

이들 소리로 리듬과 코드를 지은 후 아이들의 목소리로 멜로디를 만들어 얹었다. 라라라, 워워워, 빰빰빠라, 세상의 소리로부터 불려나온 인간의 소리는 듣기 좋았다.

두드러지고 강요하려기보다 먼저 살피고 열린 후 제 자리를 헤아리는 소리였다. 듣다가 깨달았다. 이것이 음악의 시초였구나, 인간이 세계에 대해 가진 주의 깊음과 소통하고 조화되려는 태도 같은 것.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