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단, 서계동 시대 맞아 그리스 비극 재해석 첫 무대에 올려

연극 <오이디푸스>
법인화와 함께 국립극장에서 나온 국립극단이 용산구 서계동 옛 기무사 수송대 부지에 새롭게 터를 잡은 데 이어 첫 작품으로 <오이디푸스>를 선택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 작품은 새로운 상주 공간, 새로운 연출과 배우 운용, 새로운 공연장(명동예술극장)에서 치르는 첫 번째 공연이라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남산 시대를 접고 서계동 시대를 맞은 새로운 국립극단은 이 익숙한 작품을 어떻게 변주할까.

오이디푸스, 비극적 영웅 아닌 보통 남자로 재해석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는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함께 비극적 인물을 가장 상징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테베의 왕자로 태어난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리라'는 신탁의 운명을 피하기 위해 출생과 동시에 버려졌지만 결국 자기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다.

손진책 예술감독
이제까지 오이디푸스에 대한 묘사는 '비극적인 영웅'이라는 이 소포클레스의 원작 설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때문에 이번 국립극단의 공연은 오이디푸스라는 인물을 어떻게 재해석하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한태숙 연출가는 이번 작품을 맡으면서 '그리스 비극'이라는 형식에 갇히지 말자는 원칙을 세웠다. 재해석의 고민 끝에 나온 새로운 오이디푸스는 '평범한 보통 남자' 오이디푸스. 도전과 좌절, 상승과 추락의 과정을 반복하는 오이디푸스의 운명에서 현대인의 동질감을 발견한 결과다.

새롭게 해석된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는 살다가 우연히 위기에 봉착하게 되는 평범한 남자의 이야기로 그려진다. 배경과 줄거리는 원작을 바탕으로 하되 대사와 음악, 의상, 무대 등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바꾼다.

얼마 전 열린 간담회에서 한 연출가는 "한 치 앞도 모르는 운명 앞에 인간은 모두 장님이고 그게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말하며 "이 세상을 사는 평범한 인간이 모진 운명과 만났을 때 처신하는 모습과, 그 과정을 겪으면서 자기 파멸에 이르는 과정을 담아냈다"고 설명했다.

한 연출가가 구축한 보편적이고 평범한 남자 오이디푸스 역에는 배우 이상직이 낙점됐다. 오이디푸스의 삼촌이자 처남인 크레온 역에는 정동환, 오이디푸스의 어머니이나 아내가 되는 요카스테 역으로는 서이숙이 캐스팅돼 <고곤의 선물>의 호흡을 그대로 이어간다.

연극 <오이디포스> 공연 강연
남자였지만 신의 저주로 여자의 몸으로도 살았던 양성적 존재인 예언자 티레시아스는 배우 박정자가 맡아 <에쿠우스>에서 보여준 양성적 매력을 다시 보여줄 예정이다.

레퍼토리 씨어터로 재탄생하는 국립극단

한편 국립극단은 이번 <오이디푸스>의 공연을 시작으로 다양한 레퍼토리 작품을 찾는다는 계획이다. 그동안 연극계에서는 국립극단이 60년의 역사를 가졌음에도 대표적인 레퍼토리 작품이 없다는 점을 지적해왔다. 이는 국립극단의 기존 공연 제작 운영방식이 일회적이고 소모적이었다는 의미다.

이에 재단법인 국립극단은 이러한 지적을 받아들여 레퍼토리 씨어터를 목표로 새롭게 거듭날 전망이다. 지난해 임명된 은 이번 <오이디푸스>부터 지속적인 공연을 통해 완성도를 높이는 한편, 국립극단을 대표하는 레퍼토리 공연을 개발하겠다고 출사표를 던졌다.

이 계획은 국립극단의 새 터인 서계동 열린문화공간을 중심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열린문화공간 내 위치한 '백성희 장민호 극장'에서는 3월에 배삼식 작가가 쓴 <삼월의 눈>이라는 작품을 손진책 연출로 공연한다. 연극계 원로인 백성희, 장민호 선생의 이름을 딴 이 극장은 매년 3월 한 달 동안 국립극단 작품을 프리젠테이션하는 축제를 열 계획이다.

5월에는 극단 산울림 대표인 임영웅 연출가가 사도세자의 비극을 다룬 창작극 <푸른 이끼>(가제)를 선보이고, 8월에는 최인호의 <한스와 그레텔>을 독일 연출가의 손을 거쳐 무대에 올린다. 이어 11월에는 배삼식 작, 김동현 연출의 <이장>을 소개하는 한편 러시아 연출가를 초청해 셰익스피어 작품을 내놓는 등 1년 계획이 이미 다 짜여져 있다.

열린문화공간 내에 있는 소극장 판에서는 젊은 작가와 연출가들을 위한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이 진행될 예정이다. 극단 측은 이곳을 무용과 음악 등 연극의 경계를 뛰어넘는 실험적이고 다원적인 예술작품의 공간으로 운영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번 국립극단의 페러토리 씨어터로의 적극적인 변화 모색은 크게는 한국연극의 대중화 측면에서도 의미 있는 움직임이다. 손 예술감독은 "지금까지 국립극단은 연극 마니아들만을 위한 극단이었다면, 이제는 전 국민에게 찾아가는 극단이 되어야 한다"고 피력하며 "관람을 위해 시간을 자주 내지 못하는 관객들이 좋은 작품을 놓치지 않도록 레퍼토리화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겠다'고 강조했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