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현 개인전바이칼호서 신안 염전까지 맘모스 이동 궤적을 민족의 발생 과정으로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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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민족에 관하여>라는 전시 제목은 문제적이다. 도대체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아직도 민족 타령이란 말인가. 전시를 둘러보는 동안 의문은 점점 더 커진다. 시대착오적이라기보다 삼천포로 빠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정작 전시 내용에는 '민족'이 등장하지 않는다. 시베리아 바이칼호와 신안 의 풍광이 펼쳐져 있고, 맘모스의 흔적과 그것을 따라간 작가의 여정이 정리되어 있을 뿐이다. 여기가 미술관인지 자연사박물관인지 헷갈릴 정도다. 하지만 는 전시 제목이 직설이라고 강조했다. 그 이유를 세 단계로 풀어 봤다.

스텝 1 안산에서 시베리아까지

출발점은 안산 국경 없는 마을이었다. 영국에서 유학하고, 프랑스와 독일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이방인으로 지낸 경험이 있는 에게 그곳의 풍경은 낯설지 않았다. 특유의 문화를 접하며 다민족사회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사람들이 어떻게 태어난 곳으로부터 떠나고 새로운 곳에 머무는가, 에 대해서도.

단서는 엉뚱한 데서 나타났다. 으로 유명한 신안에는 소금박물관이 있다. 그 앞에 선 맘모스 모형이 작가의 눈길을 끌었다. 알고 보니 맘모스가 소금을 따라 이동했다는 설이 있다. 좋은 소금이 나는 곳에서 맘모스 뼈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아주 오래 전에는 사냥거리를 찾아서, 근대 이후에는 전쟁 때문에 혹은 돈 때문에 떠돈다. 생존과 관련된 무언가에 쫓기거나 끌려 다닌다. 그리고 이동은 '민족'에 이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경계를 넘으며 민족의 고유함과 단일성은 해체되지만, 그럴수록 민족에 대한 집념은 강해진다.

는 그 이동의 궤적이 민족의 발생 과정이라고 봤다. 시베리아에 살던 맘모스가 어떻게 한반도까지 왔을까 싶지만 소금 때문이라고 설명하면 명쾌해지는 것처럼, 민족에 대한 신화도 인류의 생존 과정에서 만들어졌다고 이해할 수 있다. 작가는 맘모스가 태어난 곳이자 많은 인류 신화의 기원인 바이칼호로 '돌아가' 보기로 한다.

스텝 2 맘모스와 리아나

전시장에는 어른 키만한 맘모스 상아가 놓여 있다. 반쯤은 진짜고 나머지 부분은 작가가 복원했다. 전체적으로 쇠를 입혀 자연스럽게 녹이 슬도록 했다. 시간을 보여주려는 의도다. 주변에는 100년 전 바이칼호의 모습이 담긴 엽서가 확대되어 있다. 일부러 흐릿하게 만들어 정확한 형태를 알아보기 어렵다. 실재이면서도 모호한 시공간이다. 민족이 종종 그러하듯이, 사람들이 자신을 설명하는 데 동원하는 역사적 정체성이 종종 그러하듯이.

전시장 한 쪽에 세워진 바이칼호 샤먼의 집 안에서는 한 여성의 인터뷰가 방송되고 있다. 그녀의 이름은 리아나. 작가가 바이칼호에서 우연히 만난 여성으로 조상이 연해주 출신이다. 스탈린 정권 시절 강제 이주 정책에 의해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을 거쳐 시베리아까지 오게 된 그녀의 계보는 바로 고려인의 역사다. '한국인'의 얼굴을 가졌지만 한반도에 머문 사람들과는 다른 길을 통해 다른 말을 쓰고 다른 삶을 살게 된 그녀는 맘모스와 나란히 민족에 관하여 증언하고 있다.

스텝 3 얼룩과 소금물 그림

지구의 역사에 비추어 보면 사람의 역사도 철새의 역사나 다를 바 없다. 떠나고 머문다. 머물다 떠날 때는 흔적을 남긴다. 철새는 쉬어 가는 땅마다 똥을 싼다. 몸을 최대한 가볍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전시장에 내걸린 하얀 얼룩 사진은 한 순간이나마 그들이 여기 살았다는 증거다.

바이칼호에서 돌아온 는 다시 신안을 찾았다. 3년간의 여정을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 안으로 들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음에 담아온 바이칼호의 풍경이었다. 작가의 움직임에 따라 하얀 소금이 우우,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곧 땅으로 스며들어 버릴 얼룩을 찍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는 일이다.

그런데 왜 하는 걸까. 작가의 여정을 충실히 따라온 관객이라면 이미 나름의 해답을 얻었을 테지만, 추측해 보건대 인류의 짧은 역사 속에서 힘을 발휘한 많은 구분과 경계, 이념과 믿음이 저렇게 만들어졌음을 빗대는 행위가 아닐까. 그렇게 볼 때 <보고서-민족에 관하여>라는 제목은 대유가 된다.

전시는 2월27일까지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에 위치한 성곡미술관에서 열린다. 는 올해 성곡미술관 내일의작가로 선정됐다. 02-737-7650.

인터뷰

작가 자신은 '민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사람들이 집을 지키기 위해 만든 담처럼 느껴진다. 일종의 정치적 판타지 같다. 안산 국경 없는 마을에서, 또 리아나를 만나면서 사람들이 '민족'이란 말로 규정해온 것이 얼마나 규정할 수 없는 것인지 생각했다.

역사적 모티프를 활용해 역사를 패러디하는 작업을 주로 한다. 이유가 뭔가.

역사가 가진 성질에 관심이 있어서인 것 같다. 한 시공간에서 사람이 만들어내는 사건이라는 점 말이다. 사람들은 역사를 쌓아올려 정체성을 만들지만, 너무 높이 쌓으면 정체성이 오히려 시야를 가리는 것 같다. 그런 상황을 잠시나마 흩뜨리는 게 미술의 기능이 아닐까. 물 위에 그림을 그리는 작업도 그런 의미다.

다음 작업은 뭔가.

작년 독일에 갔을 때 라인강변에 대형 말뚝을 박는 작업을 했다. 자연과 문명의 경계를 표시하는 의미였다. 이 말뚝을 공사 중인 4대강변에 설치하면 어떨까 생각 중이다. 4대강 사업의 모델이 라인강이라고 하지 않나.(웃음)


갯벌
염전
새똥
나현 작가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