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아트프리즘] 미디어아트도 아름다운 작품일 수 있다

이이남 '8폭의 디지털 병풍'
대부분의 소설과 영화는 '서사'(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초기의 유성영화들을 비롯하여 적잖은 영화가 소설을 각색한 것도 사실상 소설과 영화가 서사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구조적 유사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지만 소설과 영화는 서사구조를 띤다는 점에서 유사할 뿐, 그 서사구조의 구체적인 형식에서는 근본적인 차이가 난다. 그것은 소설과 영화가 지닌 매체적 특성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사모아 채트먼은 소설과 영화가 지닌 서사구조의 근본적인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서사란 단순히 이야기만을 뜻하는 것이 아닌 이야기가 진행되는 방식까지 포함한다.

가령 주인공의 1인칭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는가, 혹은 제 3자의 객관적인 관찰자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는가에 따라서 이야기의 의미가 독자에게 다르게 전달될 것이다. 또는 묘사적인가, 혹은 서술적인가에 따라서도 작품의 의미나 느낌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크리스찬 마클레이 '시계'
여기서 묘사(narration)와 서술(description)의 구분에 주목해 보자. 서술은 시간적인 사건을 스토리로 전달하는 것이다. 가령 한 남자가 편의점으로 들어간다고 치자. 서술은 그 사실을 전달하는 문장이다. 이에 반해서 묘사는 그 남자가 어떤 옷을 입고 있으며, 왼쪽 약지가 아닌 중지에 실반지를 차고 어떤 반지를 차고 있는지, 혹은 어떤 말투를 지닌 사람인지에 대해서 정밀하게 전달하는 문장이다.

따라서 서술은 시간적 경과를 담고 있는 반면에, 묘사는 그러한 시간적 경과를 정지시킨다. 편의점에 들어가는 남자에 대한 매우 정밀한 묘사를 하는 문장은 어떤 시간적 경과로부터도 배제되어 있는 셈이다.

소설은 이렇게 서술과 묘사의 시간이 구분되어 있다. 그러나 영화의 경우 묘사를 위한 별도의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말하자면 묘사를 위한 정지된 순간이 없다. 영화에서 한 남자가 편의점을 들어가는 장면은 서술이자 동시에 묘사이다.

그러나 과거 영화의 관행은 소설과 다른 영화에 대한 매체론적 통찰을 담고 있지 못하였다. 영화는 소설보다 더 확실하게 사건을 서술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말하자면 영화는 소설이 머릿속에서 상상으로만 제공하던 것들을 생생한 장면으로 구현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영화는 소설이 구현하고자 하였지만 소설의 매체적 한계 때문에 불가능하였던 것을 구현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영화는 소설보다 더 훌륭한 소설이 된 셈이다. 이것이 영화라는 매체가 지닌 미덕으로 여겨졌다.

크리스찬 마클레이 '전화'
하지만 시각매체라는 특성 상 영화는 서술뿐만 아니라 묘사에 초점이 맞추어질 수밖에 없다. 사건과 이야기를 구성하는 서술보다 묘사가 강조될수록 영화는 소설과는 다른 것이 되어 버린다. 영화에서 묘사는 서사와 충돌하거나 자연스러운 서사의 진행을 방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가령 주인공이 방안에서 권총으로 자살을 할 경우 소설에서 묘사는 자살과 관련된 것에 제한된다. 한편 영화에서 주인공이 자살하는 장면을 그가 있는 방 전체를 딥 포커스로 세세하게 찍을 경우 관객의 시야는 어느 특정한 부분에 집중하지 않을 수도 있다.

묘사가 강조될수록 관객은 서사에 통합되기보다는 그로부터 일탈하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소설과 영화는 구분된다. 영화의 관객은 더 이상 영화를 소설처럼 읽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소설을 읽는 관행으로부터 일탈하는 체험이다.

소설과 영화에 대한 이러한 매체적 특성의 논의는 이이남의 미디어아트 작품에서 전통 회화와 미디어아트의 매체적 특성에 관한 논의로 확장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전통적인 작품을 미디어아트로 리메이크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소설을 영화화한 전통적인 영화의 관행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가령 그는 몇 대의 디스플레이어를 수직으로 연결하여 박연 폭포를 실감나는 동적인 화면으로 재구성한다.

음향과 함께 높이 올려진 디스플레이어로부터 떨어지는 폭포의 물은 정선이 매체의 한계 때문에 결코 실현할 수 없었던 진경산수의 꿈을 실현하고 있는 듯하다. 이는 분명 뉴미디어라는 매체가 지닌 장점을 활용한 것이다.

'8폭의 디지털 병풍'은 그림의 소재에서는 전통적인 병풍의 그림을 담고 있다. 하지만 병풍에 매달린 그림은 화선지에 그려진 그림이 아닌 액정화면의 이미지들이다. 절기로 나눠진 그림에서 나비와 새들은 날아다니며 비와 눈이 내린다. 심지어 나비는 한 화면에서 다른 화면으로 프레임을 넘어서 날아다닌다.

전적으로 이질적인 디지털 기술과 극동의 회화가 하나로 겹쳐진 셈이다. 여기다가 말 그대로 서양의 가장 표준적인 음계를 나타내는 '캐논'을 우리의 전통악기인 가야금으로 연주한 곡이 흐르는 것도 인상적이다.

이이남의 작품이 국내를 넘어서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고 호평을 받는 것은 뉴미디어를 활용한 그의 작품이 지닌 이러한 독창적인 활용 때문이다.

그는 정선이나 고흐, 클림트뿐만 아니라 팝아티스트인 앤디 워홀의 작품들을 뉴미디어를 통해서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시킨다. 때로는 이 고전작품들을 디지털 매체로 재현하는 것을 넘어서 디지털 기술만이 지닌 가능성을 실험하기도 한다. 가령 고흐의 자화상은 두 개의 디지털 디스플레이로 구성되어 있다.

오른쪽 디스플레이에는 의자에 앉은 사람들 위에 고흐의 자화상이 걸려있는 한편, 왼쪽 디스플레이에는 빈 액자만이 있다. 그런데 시간이 경과할수록 오른쪽 고흐의 자화상은 마치 퍼즐의 조각처럼 조금씩 뜯어져서 나뭇잎처럼 바람에 휘날려 왼쪽 디스플레이의 빈 액자를 채우기 시작한다.

마침내 왼쪽의 빈 액자는 고흐의 자화상이 되며, 오른 쪽에 걸린 고흐의 자화상은 빈 액자가 되고 만다. 뉴미디어가 주는 기술적 가능성을 재치 있게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의 작품이 주목을 받는 것은 미디어아트가 전통의 회화처럼 아름다운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점이다. 그의 미디어아트는 기계 덩어리나 유치한 게임, 혹은 다소 기괴한 설치물이라는 편견을 확 바꾸어놓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바로 그의 작품이 지닌 이 장점이 동시에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은 외관상 분명히 뉴미디어만이 가능한 작품이기는 하지만 전통적인 관행을 넘어서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소설을 각색한 영화가 소설이라는 매체적 한계를 넘어서 소설보다 더 리얼한 소설을 구현하였듯이, 그의 작품은 회화를 넘어서고 있는 듯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전통적 회화가 추구하던 아름다움과 시선의 몰입을 더 극대화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의 작품은 외관상 뉴미디어의 장점을 활용하고 있는 듯하지만, 결코 미디어적인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는 작품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고전적인 관행에 매우 충실한 작업일 뿐이다. 단순히 과거 회화가 지닌 매체의 한계를 극복할 뿐, 결코 새로운 예술이 아니다.

이 점에서 크리스찬 마클레이의 작품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마클레이는 기존의 영화를 아무런 가공 없이 자의적으로 뜯어내고 편집한 비디오 예술작품을 만들었다. '전화'나 '시계'와 같은 작품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기존의 이미지를 억지로 변형하지도 않을뿐더러, 근사하게 꾸며대거나 화려한 기술로 포장하지도 않는다.

단지 전화라는 모티브를 중심으로 전화와 관련된 영화의 장면들을 오려내서 편집할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콜라주의 과정은 매우 놀라운 독창적인 결과를 낳는다. 그의 콜라주 작품은 하나의 서사과정으로 통합되지 않으면, 전화라는 동일한 모티브를 지닌 여러 장면들이 분산적으로 엮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장면의 엮음은 전통적인 이야기 구조의 방식이 아닌 오로지 리듬감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말하자면 마치 서술이 아닌 묘사에 치중한 영화가 과거의 소설과는 다른 예술이 되듯이, 그의 비디오 예술은 보는 예술이 아닌 듣는 예술이 되는 것이다. 그는 결코 현란하지도 요란하지도 않은 방식으로 전통적인 관행에 도전하였으며, 매체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였다.

예술에서 완성도는 매우 중요하다. 전통적인 미학적 가치기준에서 볼 때 많은 미디어아트 작품들이 허접해 보일 수도 있다. 이러한 경향은 미디어아트 전반에 대한 불신과 냉소로 나타날 수 있다. 이이남의 작품은 이러한 불신과 냉소를 날려버릴 수 있을 만큼 신선하고도 아름다운 요소를 지닌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예술의 전통적 관행을 뒤집고자 한 백남준의 철학이나, 자신만의 세계를 일관되게 추구한 마클레이의 진지함은 발견하기 어렵다. '이제 거실이나 마트에서도 손가락만 움직이면 예술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시대에 대중과의 소통이 가장 중요하다'는 마치 진부한 팝아트의 철학을 되풀이하는 듯한 그의 한 인터뷰가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철학은 아닐지 불안감이 든다.



박영욱 숙명여대 교양교육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