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은, 3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며 관객들 각자의 사이코드라마 완성

Easter boy 090212041-사진, 2011
거세당한 남자일까, 아니면 생리하는 여자일까. 하반신만 찍힌 데다 속옷이 붉은색으로 물들어 성별이 분명치 않은 이 사람. 더욱이 붉은 꽃과 이불로 치장한 침대 위에 엎드려 짐작을 어렵게 한다.

뒤로 묶인 손과 한쪽 다리를 감은 핑크색 붕대. 단순히 섹슈얼하다고 하기엔 그 인상이 너무나 기묘한 이 작품은, 어쩌면 손정은 작가가 하려는 이야기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할지 모른다.

작가의 전시가 열리는 성곡미술관 2관의 1층부터 3층까지 전시된 작업량이 상당하다. 2007년부터 3~4년간 작업해온 작품들은 그러나 쉽사리 작가의 의도를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심리극'의 형태로 진행되는 전시는 1층에서 시작해 3층에서 끝나는 구조가 아니라, 3층부터 역순으로 이어진다.

전시는 손정은 작가가 연출, 배우, 관객으로 등장하는 일인 심리극이자 미술치료의 과정이기도 하다.

사이코드라마라고도 불리는 심리극은 사회 부적응과 인격 장애를 겪는 이들을 진단하고 치료하기 위한 연극이다. 정신분석학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명명할 수 없는(unnamable)'이란 단어는 심리극의 성격을 대변하기도 한다.

외설적인 사랑(일부)-복합매체, 2007~2011
종교와 권력, 제도가 내포한 폭력, 왜곡된 시선과 불합리함은 작가를 신경증과 실어증으로까지 내몰았다. 그 기억은 전시장에 파편처럼 박혔다.

'사라진 비밀'의 방인 3층을 지나 2층의 '부활절 소년'들을 만나고 '코러스'가 울리는 1층까지 오는 동안 관람객들은 작가와는 다른 각자의 심리극을 완성하게 된다. 작가의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되었지만 섬세하고 은유적인 표현은 해석의 여지를 곳곳에 열어두었다.

3층, 어두컴컴한 방의 '사라진 비밀'. 이곳에선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작품을 감상할 것이 아니라, 랜턴을 들고 어둠을 속속들이 살펴야 한다. 과학자의 실험실과 흡사한 이곳엔 포르말린 용액에 담긴 박제화된 수많은 생명이 갇혀 있다.

닭, 물고기, 꽃처럼 비릿하고 향기로운 이것은 여성의 성기를 연상시키며, 이빨로 씹힌 자국이 선명한 부드러운 곡선의 엿가락은 남성의 성기 모양을 하고 있다. 인간의 성기를 닮은 이들은 동시에 투명한 유리병 속에 담겨 있지만 전자는 고요히 잠들었고, 후자는 탈출을 욕망하며 꿈틀댄다.

한쪽 벽엔 얼굴이 비닐과 실로 묶인 남자의 벗은 상체에 우유가 흩뿌려져 있다. 다소 포르노그라피적인 이 작품을 단지 권력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남성성에 대한 통쾌한 복수로만 볼 수 있을까.

외설적인 사랑(복합매체 설치)-꽃물드로잉, 2007~2011
낡은 다락방에서 찾아낸 일기장을 들추듯, 빛이 바랜 그곳은 수많은 의문과 추측만을 남긴 채 침묵하고 있다. 이곳에 어떤 비밀이 숨어 있다는 것인가. 작가의 말대로 비밀은 사라졌을 수도 있지만, 애초부터 없었을지도 모른다.

2층은 전혀 다른 세상이다. 충혈된 자궁처럼 온통 붉은색이다. 수많은 소년을 잉태한 이곳은 언뜻 가학적으로 보이지만 아름답고 따스하다. 꽃물이 든 속옷, 곱게 꽃물이 든 거즈로 감싼 다리, 꽃으로 둘러싸인 침대. 가학과 피학적 장소가 아닌, 치유와 재생의 공간이다. 전시장 중간에 소년들을 감싸 안았던 붉은 침대가 관람객을 보듬길 기다리고 있었다.

어지럽게 전선이 엉킨 무대 뒤편일까, 고대의 왕이 잠든 고분일까. 입이 심하게 훼손된 '혀가 잘린 여인들의 노래'가 들려올 듯 음산하면서도 한편으론 성스럽다.

'부활절 소년'들이 감싸고 있던 거즈를 손바느질로 연결한 퀼트는 그동안 조각나 있던 파편적 이야기와 이미지를 하나로 연결해주는 듯하다. 꽃이 짓이겨지며 나오는 고운 빛깔, 그 희생의 향기로운 물은 어머니와 예수의 이미지로 귀결된다.

성곡미술관에서 중견, 중진작가 집중 조명전으로 열리는 손정은 작가의 <명명할 수 없는 풍경>은 성곡미술관 2관 전관에서 3월 13일까지 계속된다. 이번 전시는 전시장 내 작품 캡션을 지우고 작품 제목이 적힌 작품 배치도를 제작해, 관람객 개개인의 일인 심리극을 만들어갈 수 있게 했다.

그 남자의 초상1-사진, 2007

외설적인 사랑-복합매체, 2007~2011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