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아트프리즘] 전통음악의 랑그체계 벗어나려는 시도, 원조는 바그너?

칼하인츠 슈톡하우젠
언어학자 소쉬르에 따르면 말은 개개인의 내면을 드러내는 활동이 아니다. 이는 언어란 개인의 내면을 드러내는 표현수단이라는 우리의 지극히 일반적인 생각과는 배치된다. 인간의 언어활동에서 구체적인 발화행위(빠롤, parole)는 체계로서의 언어(langue, 랑그)를 실행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소쉬르의 근본적인 생각이다.

쉬운 예를 들어서 이 난해한 생각을 풀어보자. 19세기의 이태리 음악가와 한국의 음악가가 있다고 치자. 둘은 어느 날 자신이 꿈꾸던 이상형의 연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 감격의 기쁨은 곧 두 사람의 머릿속에서 악곡으로 떠올랐다. 두 사람은 곡을 만들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똑같은 감격을 표현하였지만 두 사람의 느낌은 전혀 다르다. 이태리 음악가는 환희와 감격을 밝고 경쾌한 장조의 멜로디로 반면, 한국의 음악가가 만든 곡은 어딘지 모르게 환희와 동시에 구슬프고 처량한 느낌마저 든다.

왜 그런 현상이 생기는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서로 다른 음계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쉬르 식으로 말하자면 이태리 음악가는 장음계라는 언어체계(랑그)를 바탕으로 곡을 만든 반면, 한국의 음악가는 이와는 전혀 다른 한국의 전통음계(랑그)에 바탕을 두고 있다. 따라서 그들이 만든 곡, 즉 구체적인 발화행위는 똑 같은 감정을 표현하고자 하지만 엄청나게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언어활동은 그 언어의 체계에 완전히 지배받고 있으며, 그 언어 체계가 요구하는 것 이상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 음악에 적용하자면 어떤 음악가도 자신의 악상을 자유롭게 표현하기는커녕 음악의 랑그 체계에 지배되고 있다. 결국 그러한 체계를 벗어나지 않는 이상 자유롭고자 하는 예술의 근본적인 이상을 펼칠 수 없는 셈이다.

아놀드 쇤베르크
오늘날 전자음악은 컴퓨터를 이용한 매우 과학적이고 기술적으로 통제된 음악으로 간주된다. 우발적이고 창조적인 자유와는 상관없는 매우 엄격하고 기계적인 음악이 전자음악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오늘날 대중음악을 석권하고 있는 케샤나 비욘세, 리하나 등의 음악이 모두 전자악기에 바탕을 둔 테크노 음악임을 못마땅해하는 한 대중음악 평론가의 넋두리 속에도 이러한 선입견이 내재해 있다. 전자음악은 비인간적인 음악이며 기계적인 음악이라는 선입견.

하지만 전자음악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것의 탄생은 음악의 비인간화와는 전혀 거리가 멀다. 오히려 전자음악은 음악의 비인간화 현상 혹은 절대적인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열망에서 탄생한 것이다.

이는 전자음악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Karlheinz Stockhausen)에게서도 명백하게 나타난다. 그는 전통악기를 거부하고 전자신호 혹은 일상적인 소리를 녹음한 음들을 음악의 용재로 사용한다. 그가 이러한 음들을 사용한 이유는 기존의 음악체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기존의 음악체계, 즉 랑그체계로부터 벗어나지 않는다면 어떠한 음악적 발화행위도 단지 기존의 랑그체계를 답습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기존의 음악적 체계를 벗어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귀가 자유롭게 해방될 가능성도 없는 셈이다.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서곡 첫 부분
가령 우리는 어떤 음악을 들을 때 그 멜로디에 매료된다. 그런데 이때 멜로디에 매료된다는 것은 이미 우리에게 극히 익숙한 화음전개의 체계에 들어맞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일 따름이다. 현대음악이 매우 불편하게 들리는 이유는 우리의 익숙한 화음체계를 위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기존의 화음체계에 지배를 받고 있는 한 우리는 음악을 들을 때 매 순간 발생하는 하나의 음들을 지각하기보다는 커다란 화음이나 체계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화음의 구조가 더 지배적일수록 우리는 매 순간 발생하는 음의 강도나 색감을 정작 놓치고 만다.

슈톡하우젠은 화음을 포함한 기존의 랑그체계를 거부하며 각각의 음 자체에 대한 미시적인 현상에 주목한다. 음은 제각기 다양한 세기와 길이, 강도를 지니고 있다. 전자악기는 오로지 일정한 음의 높이만을 지닌 악기와는 달리 미시적인 차원에서 음의 소리를 마음껏 변형할 수 있다. 따라서 슈톡하우젠은 심지어 도, 레, 미와 같은 전통적인 음이 아닌 소음을 나타내는 단위인 데시벨(dB)을 활용하여 음의 체계를 구성하기도 하였다.

전자음악은 단순히 전자악기라는 새로운 악기를 활용한 음악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명백하게 하나의 음악사적 흐름, 혹은 더 거시적으로는 예술사적 흐름의 결과물이다. 그런 점에서 전자음악은 전통적인 음악의 체계로부터 벗어나고자 하였던 20세기 현대음악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해되어야 한다.

직접적으로는 쇤베르크의 무조음악이 바로 전자음악의 전사로 간주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다장조, 사장조, 내림 다단조 등과 같은 전통적인 조성음악의 체계를 파괴하였기 때문이다.

한 옥타브 내에서 7개의 음만 사용하는 장음계와 단음계는 일정한 화음을 바탕으로 하는 음악이다. 전통적인 조성음악의 경우, 다장조를 예로 들자면 도미솔, 파라도, 시레파와 같은 으뜸화음, 버금딸림화음, 딸림화음이 기본적인 토대를 이루며 여기에 부수적인 화음이나 매개변수들이 첨가된다.

말하자면 아무리 복잡한 곡이라 하더라도 일정한 상수 값이 존재하며, 복잡성은 매개변수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다. 쇤베르크는 이러한 위계적 구조를 파괴하여 한 옥타브에 존재하는 12개의 음을 무작위적으로 배열함으로써 기존의 음계를 완전히 파괴한 것이다.

물론 슈톡하우젠의 관점에서 보자면 쇤베르크의 시도는 여전히 한 옥타브 내에 존재하는 12개의 음을 사용할뿐더러 나름대로 새로운 음계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여전히 불만스러운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불만이 슈톡하우젠의 전자음악으로 이어지게 만든 요인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조성음악의 파괴가 그것을 명시적으로 거부한 쇤베르크에 앞서 이미 조성음악 내부에서 발생하였다는 점이다. 그 장본인은 다름 아닌 리하르트 바그너이다. 그는 조성음악을 사용하였지만 실질적으로 조성음악을 거의 해체시켜 놓았다. 그의 유명한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서곡의 첫 부분은 이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그림에 보듯이 못갖춘마디를 제외한 두 번째 마디의 첫 음을 살펴보자. 낮은음자리표에 있는 두 음을 포함하여 네 개의 음으로 이루어진 화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낮은음부터 살펴보면 파, 시, 레#, 솔#으로 구성되어 있다. 흔히 ‘트리스탄 코드’(트리스탄 화음)라고 불리는 이 화음은 명백한 불협화음이다.

여기서 불협화음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솔#이다. 물론 바그너 이전에도 불협화음은 자주 사용되었다. 그런데 트리스탄 코드가 그 이전의 용례와 구별되는 점은 그 불협화음이 단순히 매개변수로서, 즉 장식적 효과로서 사용되고 있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불협화음은 잠시 매개변수의 역할을 하다가 화음이라는 상수로 돌아옴으로써 해소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트리스탄 코드의 경우에 사정은 다르다. 네 개의 음으로 이루어진 이 화음 뒤에 바로 라 음이 나오며, 다음 마디에 라#이 뒤따라 나온다. 바그너 이전의 전통적 관례로는 불협화음을 제거하고 안정된 화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정상적이라면 다음 마디에 라 음이 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라 음은 단순히 경과음의 역할에 그치며 불협화음인 라#으로 이어진다. 말하자면 불협화음은 단순한 매개변수가 아닌 하나의 상수가 되어버린 것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불협화음은 매개변수가 아닌 상수로서 이 오페라 전체를 관통하는 ‘동기’(Leitmotif)가 된 것이다. 말하자면 여전히 조성음악의 틀을 유지하고 있는 이 음악에서 그 틀을 위협하는 불협화음이 역설적이게도 이 음악을 관통하는 핵심요소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전통적인 음악의 랑그체계에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전자음악의 시도는 이미 바그너에게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던 셈일지도 모른다.



박영욱 숙명여대 교양교육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