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녹색과학통역프로젝트 5개의 대표작 선보여

인도에 나온 지렁이를 대하는 방법
비온 뒤 서울대학교 '걷고 싶은 길'에서 대규모 사고가 났다. 곳곳에 부상자와 사망자가 남아 있었다. 행인들은 심지어 목숨이 끊어질듯 말듯한 피해자의 몸을 두 번, 세 번 치고 지나갔다. 햇볕에 사체가 말라 붙었다.

이 아비규환의 현장에는 대책이 필요했다. 송수정 작가는 봉변을 당한 지렁이들의 주변에 흰 선을 그었다. 길가에 묘비를 세웠고, 행인들이 아직 살아 있는 지렁이를 풀밭으로 돌려 보낼 수 있도록 청소 도구 형태의 '응급 키트'를 설치했다. 그 결과, 행인들의 발걸음은 한결 조심스러워졌다. 적어도 자연의 죽음을 '확인 사살'하는 일은 없어졌다.

송수정 작가의 ''은 과학적 지식과 통찰력을 예술의 화법과 상상력으로 대중에 전하는 '녹색과학통역프로젝트'의 취지를 잘 보여준다. 이화여대 에코과학연구소 과학자들을 중심으로 취지에 공감하는 예술작가와 디자이너, 인문학자가 함께 진행하는 프로젝트다.

생물학과 환경학 등 생명의 기본 원리를 탐구하는 녹색과학을 흥미롭고 아름답게 풀어내 도시인의 생태학적 감수성을 회복시키는 것이 목표다. 지식을 넘어 지혜를, 암기를 넘어 체험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한다. 김산하 연구원은 "외국어를 한국어로 옮길 때 때로는 직역보다 의역이 더 정확한 것처럼 통역은 단순한 작업이 아니다. 우리도 과학과 예술의 다른 언어를 제대로 통역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말했다.

2009년부터 시작된 이 프로젝트의 결과물을 볼 수 있는 전시가 마련된다. 2월 25일부터 3월 4일까지 서울 마포구 신수동에 위치한 문화공간 숨도에서 열리는 <과학이란 매력의 기본 구조>다. 다섯 개의 대표작이 전시된다.

엉터리 식물학자의 연구실 '고사목'
식물학의 무궁무진한 발견을 영감의 원천으로 삼는 '엉터리 식물학자의 연구실' 프로젝트를 진행해온 이장섭 디자이너는 이번 전시에서 고사목의 은밀한 매력을 선보인다. 우리 눈에는 그저 수명을 다한 나무로만 보이는 고사목이 생태계와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풍요롭게 죽어가고 있는 중인지를 보여준다.

식물은 동물과 달리 하루 아침에 죽지 않는다. 잎은 여전히 푸른데 몸통은 썩어가는 식으로 생사가 공존하는 기간을 오래 거친다. 그 기간 동안 많은 일을 한다. 둥치는 썩는 단계마다 다른 이끼와 균, 애벌레와 동물의 서식처가 된다. 마침내 마른 나뭇가지를 물어다 까치가 집을 짓는다.

주변 나무들의 양분이 된다. 아름드리 나무 한 그루가 사라진 자리에는 다시 햇볕이 들고, 다시 새싹이 자라난다. 이런 생명의 연속성과 연쇄성을 만들어내며 고사목들은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죽어간다. 등산 도중 만난 고사목을 함부로 지나칠 일이 아닌 것이다.

"술이야말로 식물 생태학의 총화죠." ''는 와인에 담긴 생태학적 궤적을 따라 가는 페이크 다큐멘터리 영화다. 생태학을 통하면 와인의 비밀이 명쾌하게 풀린다.

와인의 맛은 식물이 자손 대대로 번창하기 위해 진화한 역사의 산물이다. 포도알 하나에 상반된 의도가 담겨 있다. 씨앗은 동물에게 먹히지 않고 땅에 안착하기 위해 쓴 맛을 냈고, 과육은 동물에게 먹혀 멀리 퍼지기 위해 단 맛을 냈다. 이 두 갈래 역사가 어우러진 것이 와인의 오묘한 맛이다.

Bottle Ecology
우리는 와인을 마실 때 포도 나무가 뿌리 내리고 영향받은 토양과 계절까지 함께 느낀다. 북유럽산 와인은 침엽수림의 향을 품고 있고, 남미산 와인에서는 뜨거운 대지의 기운이 올라온다. 이는 식물이 한 자리에서 시간과 환경을 축적하기 때문이다.

식물, 동물학을 전공한 4명의 여성 과학자로 구성된 'Natural Girl'의 작품은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인식틀을 제공하는 이동식 연구소. 이들은 숲과 갯벌, 박물관 등을 찾아다니며 생태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해 왔다.

예를 들면 고라니와 멧돼지, 다람쥐 등이 사는 파주 임진각 근처 숲에서는 동물들을 위한 밥상을 차렸다. 메뉴만 봐도 이들이 어떤 동식물과 관계를 맺고 사는지 알 수 있다.

갯벌에서는 게와 갈매기 간 긴장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 나무틀 두 개를 놓고 그 중 하나에만 갈매기 모형을 설치한 후 관찰한 것. 아무것도 없는 나무틀에서는 게들이 속속 등장했지만, 갈매기 모형이 있는 나무틀에서는 좀처럼 게가 나타나지 않았다.

스마트폰을 활용한 자연 도감 어플리케이션 도 첫선을 보인다. 빌딩숲 사이에서 우연히 낯선 새를 발견했을 때 그의 실루엣, 머리와 꼬리의 모양 등을 단서 삼아 정체를 추적할 수 있다. 참새와 비둘기 이외에도 얼마나 다양한 새들이 인간과 동거하고 있는지 가르쳐 준다.

'누구냐 넌?'
이 전시를 기획한 김산하 연구원은 "지구 온난화 등 환경문제에 대한 해법은 생태학적 감수성을 회복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한다"고 말했다. 녹색과학의 메시지에 귀 기울이는 것은 우리 자신의 삶을 건강하게 가꾸는 일이라는 뜻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험악한 인상의 사람들도 귀여운 강아지를 보면 웃잖아요. 그게 자연을 가까이 하는 효과라고 생각해요."


Natural Girl의 이동식 연구소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