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자본주의 vita-capitalism'생명자본주의 포럼 창립세미나서 이어령 전 장관 새로운 사상 주창

"생명자본주의는 자본주의의 구멍을 메우는 패러다임입니다."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이 새로운 사상을 주창하고 나섰다. 세계적 금융위기로 '들통난' 현 자본주의 체제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생명자본주의vita-capitalism'다.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성을 바탕으로 고도화된 체제인 '자본주의'에 '생명'이 붙으니 귀에 설지만, 설명을 들을수록 유난스러운 목표를 추구하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의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취지다.

3월 3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농촌진흥청 주관, 생명자본주의포럼 주최로 열린 생명자본주의포럼 창립세미나에서 이어령 전 장관은 "말썽 많은 자본주의를 버리기 전에 한 걸음 떨어져서 제대로 보자"고 강조했다.

"자본은 곧 돈일까요? 아닙니다. 예를 들면 김연아 선수의 스케이트와 할리우드 배우의 얼굴도 자본이죠. 자본과 돈을 동의어로 생각하는 건 금융자본주의에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생명자본주의의 첫걸음은 자본의 의미를 회복하는 것이다. 자본의 라틴어 어원은 '가축'. 사람들이 가축을 자본으로, 가축이 새끼를 낳는 것을 증식으로 셈한 것이 자본주의의 시초라는 의미다. 고대인들에게 가축이라는 생명 자본이 증식하는 것은 마땅했지만, 돈이라는 물질이 이자를 낳는 것은 이상하게 여겨졌다. 유대교는 아예 율법으로 이자를 금했다.

초기의 돈도 생명의 뜻을 담은 물건이었다. 중국 은 왕조의 자안패가 대표적인 예다. 여성의 생식기를 상징하는 조개는 생명력을 나타냈다. 하지만 경제개념이 추상화되면서 돈도 남성화되었다.

이어령 전 장관은 오늘날의 금융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 장기적이고 지속 가능한 사업 추진이 불가능한 것은 자본을 생명과 연관 짓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단기적 수익 창출을 위해 노동력과 자연 자원 등 생명 자본을 희생시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경제성장 곡선과 자연의 성장 곡선의 차이는 자본주의가 얼마나 생명으로부터 멀어졌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냅니다. 오늘날 경제처럼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는 건 암세포뿐이에요."

이는 이어령 전 장관만의 외골수적 생각이 아니다. 벨기에의 경제학자 버나드 리타에는 "인류의 창조성을 해방하고 지속 가능한 풍요에 도달하기 위해 돈에 대한 생각을 쇄신하자"고 주장한 바 있다.

그는 도교의 음양상보론을 기초로 한 경제 모델을 제시했다. 즉 종래의 경쟁적이고 일시적이며 소유와 확장, 중앙집권을 부추기는 양의 통화와 그것을 보완할 수 있는 협력적이고 지속적이며 상호 신뢰와 축소를 지향하는 음의 통화를 함께 사용하자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계, 품앗이 등의 문화가 음의 통화로써 기능할 수 있다. 이런 자본의 흐름 속에는 자연스럽게 이타적인 인간성과 사회관계가 섞여들 수 있다.

<자연자본주의>의 저자인 폴 호킨도 생명 시스템의 원리로 작동하는 자본주의를 주창했다. 그가 제안하는 지속 가능한 산업으로는 '바이오미미크리Biomimicry(생체모방 기술)'가 있다. 사바나의 흰 개미 집의 원리를 응용한 냉난방장치나 모기의 침에서 힌트를 얻은 아프지 않은 주사 바늘 등이 그 예다.

이어령 전 장관은 이런 산업적 철학이 경제와 환경을 함께 살리는 녹색 성장을 뒷받침해줄 수 있다고 말했다.

"자본주의의 방향을 전환하려는 이 모든 생각들은 한국문화 속에서 가장 잘 실현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전통이 생태적 삶의 방식과 사상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살림살이'라는 말은 집안의 경제와 삶이 떨어져 있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생명자본주의의 핵심은 관계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돈의 교환은 물론 사람들 간 교류, 자연과의 교감이 동시에 일어나는 공동체가 적절한 무대가 될 수 있다.

이어령 전 장관이 "지역과 생명에 대한 사랑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공동체를 창조할 필요"를 강조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결국 경제적 행위는 삶의 목적이 아니라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 생명자본주의의 메시지다. 어리석은 인류는 이 당연한 이야기를 너무 오래 잊었다.

바이오미미크리Biomimicry

'생체모방기술'을 뜻하는 '바이오미미크리Biomimicry'는 자본주의의 생태적 전환을 꿈꾸는 이들이 주목하는 핵심 기술이다. 개념은 새롭지만 연원은 얕지 않다. 자연은 언제나 인류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어 왔다. 비록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새를 본떠 '날아가는 기계'를 스케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상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바이오미미크리의 예는 벨크로테이프가 있다. 천의 꺼끌꺼끌한 면과 부드러운 면이 붙도록 만든 이 테이프는 한 사냥꾼이 숲에 갔다가 우엉 가시가 옷에 달라붙은 것에서 힌트를 얻어 발명했다.

온도가 극심하게 변하는 사바나에서도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는 흰 개미의 땅굴에 주목한 연구자들은 그 구조를 건물에 적용시켰다. 짐바브웨에 있는 이스트게이트 센터는 그 덕분에 혁신적으로 에너지를 절감할 수 있게 됐다.

거미가 그물을 치기 위해 뽑아내는 실도 연구자들의 호기심을 끌었다. 방탄조끼용으로 쓸 수 있을 만큼 튼튼한 이 실로 연구자들은 낙하산 줄, 다리를 지탱하는 케이블, 인공 관절 등을 만들었다.

디지털 기기에도 바이오미미크리가 접목되어 있다. 퀄컴사는 2007년 자연광이 물체에 반사되면서 특정 색을 내는 원리를 이용한 간섭변조(IMOD:Interferometic modulation) 기술을 개발해 디스플레이 패널에 적용했다. 환상적인 푸른 빛의 날개를 지닌 몰포나비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 이 디스플레이 패널은 휴대폰과 전자책 단말기 등에 쓰이고 있다.

최근에는 건축공학 역시 바이오미미크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다. 건축가들은 유기체처럼 변형 가능한 건축물들을 고안해내고 있다. 스위스에서는 조립식 다리가 만들어졌고, 벨기에에서도 트위스트 형태의 움직이는 다기능 건물을 짓고 있다.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